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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 차이 인정·대화의 틀… ‘독일식 공존’서 한반도형 해법 찾자 [심층기획-신국제질서, 한반도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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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민주 기자 chapte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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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서 ‘두 국가’로 맞선 南北 관계

남북·동서독 분단 모두 냉전 대립 산물
대치 속 1991년 도출한 남북기본합의서
통일에 대한 합의보단 안정적 관리 방점
남북 ‘특수관계’로 규정… 체제 인정 핵심

北 ‘적대적 두 국가’ 노선 기존 틀 흔들어
동서독 1972년 기본조약으로 대화 시스템
‘상주대표부’ 설치 국가 간 협의 채널 운영
현실적 관리·장기 목표로 결국 통일 이뤄

한반도 핵 문제와 미·중·러 관계 특수성
北, 독일식 체제 통합에 알레르기 반응
전문가들 “남북 단순 교류 확대엔 한계
주권 인정하는 소극적 공존부터 시작을”

남북한, 동서독의 분단은 냉전시대 진영 간 극한 대립의 산물이었다. 역사, 언어, 조상을 공유하는 민족임에도 서로를 적대시하고 때로 물리적 충돌까지 불사했다. 긴 세월 분단이 이어지며 긴장과 대립이 실질적 부담으로 작용하자 양측은 대화, 협력을 위한 시스템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응축되어 나온 결과가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다.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자고 합의한 문서는 아니었다. 일단은 공존을 모색했다. 결국 동서독은 1990년 통일을 이뤘다. 남북한은 통일은커녕 극한 대치를 해소하기 위한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 북한이 2023년 발표한 ‘적대적 두 국가론’의 기치를 최근보다 선명히 하면서 한반도의 긴장은 더욱 첨예해지고 있다. 대화, 협력의 틀에 대한 고민이 한층 깊어지면서 독일 사례가 또다시 주목을 받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적대적 두 국가론’ 기조 아래 남한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적대적 두 국가론’ 기조 아래 남한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남북, ‘민족’에서 ‘두 국가’로

남북한이 1991년 도출한 기본합의서는 통일에 대한 합의라기보다는 안정적 관계 관리에 방점을 두었다. 여기에서 남북은 ‘특별한 관계’로 규정된다.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제1조에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못 박았다. 당장 통일을 이루기보다, 먼저 상대 체제를 인정한 채 관계를 관리하자는 취지였다. 제5조는 현 정전 상태를 “공고한 평화 상태”로 바꾸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규정했다. 한국의 법률은 지금도 남북을 일반적인 외국 관계와는 다르게 보고 있다.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제3조 1항은 “국가 간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하고 있다. 2항은 남북 간 거래를 민족 내부의 거래로 본다.

2023년 말 북한은 남북을 더 이상 민족 관계가 아니라, 서로 적대하는 두 국가 관계라고 해 남북기본합의서 이후 이어져 온 화해와 공존의 틀을 정면으로 흔들었다. 최근에 적대감을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제도화까지 시도하는 중이다. 북한이 기본합의서 내용을 부정하는 적대적 두 국가 노선을 분명히 하면서 남북은 관계를 바라보는 기본 입장부터 달라진 상태다.

◆동서독, 체제 차이 전제 관계 관리

북한이 ‘민족’이 아닌 ‘적대적’이란 수식어까지 넣어 ‘두 국가’를 강조하면서 당장 걱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대립의 격화와 이로 인한 교류의 단절이다. 동서독의 사례가 우리에게 참고가 되는 것이 이 지점이다. 동서독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서로 다른 체제를 유지했고, 통일을 염두에 두면서도 국가 간 관계를 전제로 한 시스템을 마련해 운용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2차 세계대전 뒤 독일은 서방 진영에 서며 자본주의를 수용한 서독과 소련 진영에서 사회주의를 택한 동독으로 갈렸다. 같은 독일이었지만 사회 체제는 완전히 달랐고, 격하게 대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적 왕래, 국제사회 속 관계 정리 문제까지 외면할 순 없었다. 결국 양측 현안을 조율하는 틀을 만들자는 합의를 이뤘고, 그 결과가 1972년 12월21일 맺은 기본조약이다.

동서독은 기본조약을 통해 “평등에 기초한 정상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분쟁을 평화적으로 풀고, 무력을 쓰지 않으며, 서로의 국경과 영토를 존중하기로 했다. 또 경제·교통·보건·문화 등 실생활과 맞닿은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우편·전화 같은 통신 문제나 사람들의 왕래, 교통 연결처럼 분단 상태에서 생기는 불편을 함께 풀어가겠다는 뜻이었다.

 

특히 주목할 것이 상주대표부를 두기로 했다는 점이다. 국가 간 외교의 거점으로서 일반적으로 설치하는 대사관보다 뚜렷하지 않지만 ‘국가 대 국가’라는 관점에서 양측 관계를 협의하는 시스템을 마련한 것이다. 당시 통일에 대한 동독, 서독의 생각은 달랐다. 서독은 동독과 다시 하나가 돼야 한다는 원칙을 유지했다. 반면 동독은 서독과 별개 국가로 인정받길 원했다. 기본조약은 양측의 이런 입장을 절충했다. 서로의 차이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면서, 완전히 둘로 갈라진 별개의 국가로 선언하지는 않았다. 서독 정부는 기본조약을 통해 동독과의 접촉과 대화를 늘려 관계를 관리하면서 통일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다. 기본조약에 붙인 별도 문서에서 기본조약이 헌법상 통일 목표와 충돌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현실적인 관리와 장기 목표를 함께 가져간 셈이다. 서로 다른 체제를 유지한 채 대화의 규칙을 만들어 운영하다 실제 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이 주목할 대목이다.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열린 통일 기념행사에서 독일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1990년 통일로 독일은 유럽의 대국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열린 통일 기념행사에서 독일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1990년 통일로 독일은 유럽의 대국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독일식 참고한 한반도형 해법 필요

동서독의 사례를 남북한의 상황에 기계적으로 대입할 수는 없다.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북한은 독일식 접근 자체를 체제 흡수통일의 경로로 의심하는 경향이 강하다.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제 차이를 인정한 채 관계를 제도화하는 출발점이었다면, 북한은 남북관계의 제도화가 곧 통일 논의나 체제 경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계심이 짙다. 또 당시 독일은 냉전 완화와 국제질서 재편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관계 개선과 통일 논의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는 1953년 정전체제가 아직 평화체제로 전환되지 못했다. 게다가 핵·미사일 문제, 미국과 중국의 전략경쟁,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까지 남북만의 합의로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그러나 남한은 통일을 지향하고 북한은 두 국가론을 소리 높이는 지금의 상황이 서로 다른 체제를 인정하면서 충돌을 줄이고 접촉을 이어갔던 독일 사례를 참고할 수는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특수성이 반영된 틀을 짜는 일이다.

지난 3월 통일부가 연 ‘한반도 평화전략 자문단’ 제3차 회의에서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제기됐다. 도경옥 충남대 교수는 동서독이 기본조약 체결 당시 서로 다른 국가 인식을 완전히 없애지 못한 채 각자의 해석을 서면으로 덧붙이는 방식으로 절충한 사례를 언급하면서, “남북도 북한의 두 국가론과 한국의 특수관계론이 병립하는 현실을 유연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북한이 독일식 접근을 경계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공감대도 형성됐다. 권만학 경희대 명예교수는 “북한은 사실 독일식 체제 통합에 대해 굉장히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가지고 있다”며 “우리가 제안하는 교류협력을 순수한 협력이 아닌 체제 변화를 노린 ‘화평연대(문화 교류, 정보 유입 등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전략)’ 혹은 체제 흡수를 위한 경로로 오인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한국이) 체제를 인정하고 적대하지 않겠다고 말은 하지만, 종국에는 흡수통일로 끌고 가려는 것 아니냐는 북한의 의구심과 불신을 걷어내지 못하면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짚었다. 박명림 연세대 정치학 교수 또한 “북한에게 독일 모델은 성공의 모델이 아니라 ‘동독의 실패 모델’이자 ‘붕괴 모델’일 뿐”이라며 “이제는 (북한이 세우는) 장벽을 주권의 경계로 인정하는 ‘소극적 공존’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전문가들은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 단순히 교류협력만 확대하는 접근에는 한계가 있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남북이 서로의 체제와 주권, 장기 목표를 어디까지 인정하고 어떤 틀 안에서 충돌을 관리할지를 먼저 다시 정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독일 사례의 교훈도 통일을 이뤘다는 점보다는 서로 다른 국가 인식을 인정하며 대화와 공존의 규칙을 제도화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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