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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6시간… 국가가 흔들린 밤, 비상계엄 1년의 기록 [박수찬의 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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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2-02 09:21:25 수정 : 2025-12-02 09:21:22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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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3일 밤부터 4일 새벽에 걸쳐 발생한 6시간의 비상계엄은 수많은 사람들을 ‘불면의 밤’으로 몰아넣었다.

 

그 어떤 사전 징후 없이 갑작스레 선포된 계엄에 일반 시민들은 물론 군인들마저 혼란에 빠졌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직후인 지난 2024년 12월 4일 새벽 계엄군이 탑승한 헬기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진입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북한군을 겨눴던 총을 국민에게 돌리라는 군대의 존재가치를 뿌리째 흔드는 명령을 국민과 군인은 납득하지 못했다.

 

국회는 4일 새벽 1시1분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시켰고, 3시간여가 지난 후 계엄은 해제됐다.

 

지난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이후 40여년 만에 등장한 계엄은 매우 짧았지만, 군과 사회 전반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린 ‘망각’이 불러온 비극이다.

 

◆상상도 못했던 계엄

 

1년 전이었던 지난해 12월 3일 늦은 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을 때, 기자는 집에서 늦은 퇴근에 따른 피로를 풀고 있었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지난 2024년 12월 3일 밤 서울 용산역 대합실에서 비상계엄 선포를 전하는 뉴스 속보가 전해지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밤 10시 25분쯤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오니 아내가 “계엄령이래!”라며 빨리 뉴스를 보라고 재촉했다.

 

TV를 보니 윤 대통령이 ‘반국가세력’ 등의 거친 단어를 사용하며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담화문을 읽는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믿었던 계엄령이 30여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다시 등장한 것을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책과 영화로만 접했던 계엄을 실제로 겪게 된 상황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천안함 피격, 북한의 비무장지대(DMZ) 포격 도발과 핵실험을 비롯한 군사적 돌발 상황을 많이 겪었지만, 비상계엄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한동안 멍했던 순간이 지나가자 머릿속엔 ‘당장 국방부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계엄군이 용산 일대를 봉쇄하기 전에 국방부 청사로 들어가야 전체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택시를 타고자 오후 10시 40분쯤 집을 나섰다. 머리는 젖어 있었고, 실내복에 패딩만 걸치고 노트북 가방을 짊어졌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지난 2024년 12월 3일 밤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 도로가 경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로 가로막혀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국방부 서문에 도착했던 오후 11시 22분 스마트폰 문자 알림음이 들렸다. 스마트폰 화면에 뜬 문자 메시지 제목은 ‘계엄사령부 포고령(제1호).’

 

스마트폰 화면이 흔들렸다. 손이 떨리면서 스마트폰도 흔들린 것이었다. ‘위반 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는 구절에서 눈을 땔 수 없었다. 황당함과 두려움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온몸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신문사에 보고하고 국방부 서문으로 들어가려는 기자를 군사경찰들이 출입게이트에서 저지했다.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야한다고 생각하던 기자의 눈에 한 대통령실 출입기자가 출입게이트를 통과하는 것이 보였다.

 

이때다 싶어 “대통령실 기자는 들어가는데, 국방부 출입기자는 왜 못들어가느냐”고 항의했다. 난감해하던 군사경찰들은 결국 통과를 허락했다.

 

하지만 국방부 청사 현관 앞에서 또다시 가로막혔다. 밤 11시 30분이 가까워지던 시점이었다.

 

청사 현관은 1층 기자실과 대변인실로 이어지는 통로를 이용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출입기자를 가로막는 경우가 어디 있냐. 이유라도 설명해달라”고 항의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직후인 지난 2024년 12월 4일 새벽 계엄군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진입하자 국회 보좌진들이 소화기를 분사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청사 1층 창문 너머 기자실을 보니 군사경찰이 기자실에 들어와 있었다. 군사경찰의 퇴거 요구를 기자들은 거부했고, 현관 앞에 모인 기자들은 출입 허용을 요구했다.

 

국방부 경내로 들어오지 못한 기자들은 대통령실과 국방부 맞은편 전쟁기념관 입구 쪽에 모였다.

 

현관 앞에 앉아 기사를 작성하는 동안 국방부 실·국장을 비롯한 당국자들이 속속 청사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굳은 표정이었고, 질문을 해도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밤 11시50분쯤 군사경찰이 “기자실은 민간인 출입을 허용한다”고 말했다. 국방부 대변인실은 “민간인을 내보내라는 지침 하달 과정에서 군사경찰의 오해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기자실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뒤, 연락을 시도했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만한 사람, 현 상황을 일부라도 설명해줄 수 있을 사람이라면 통화를 시도하거나 메시지를 보냈다.

 

대부분 응답이 없었지만, 일부는 연락이 닿았다. “황당한 상황” “매우 잘못된 조치”라는 격앙된 반응이 흘러나왔다.

 

한 소식통은 “국회 상황을 봐요. 이 밤 안에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을 가결시키면 상황 종료지만, 그렇지 못하면 계엄은 성공할 겁니다”라고 전했다. 그때부터 기자의 눈과 귀는 국회 상황을 전하는 속보에 쏠렸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가 해제했던 지난 2024년 12월 4일 새벽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 있었던 바리케이드가 제거되어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4일 오전 1시1분 국회 본회의에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됐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기자실에서 속보를 작성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해제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해제는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윤 대통령이 고집을 부릴 수 있다는 걱정도 들었다. 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저질렀는데,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오전 3시40분쯤 국방부 당국자가 기자실에 와서 “상황이 마무리될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비상계엄 선포 건의는 김용현 국방부장관이 대통령께 했다”고 덧붙였다.

 

계엄법에 따르면 국방부장관과 행정안전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계엄 선포를 건의할 수 있다. 오전 4시에 국방부 비상소집령이 해제됐고, 당국자들이 퇴근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전 4시27분. TV에선 윤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국무회의를 열고 계엄을 해제할 것”이라고 밝히는 모습이 나왔다.

 

오전 4시32분에는 군 입장문이 나왔다. “4일 오전 4시22분, 투입된 병력은 원소속 부대로 복귀하였다”며 “현재까지 북한의 특이 동향은 없으며, 대북 경계 태세는 이상 없다”는 내용이었다.

 

기자도 오전 6시쯤 국방부 청사를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귀가 후 옷만 갈아입은 채 오전 7시반쯤 국방부로 돌아와 기사 작성 준비에 들어갔다. 계엄과 탄핵, 대선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혼란의 한복판에 서는 순간이었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지난 2024년 12월 4일 새벽 계엄군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경계를 서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그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었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군인과 정치 지도자라면 명심해야 할 단계별 요소들을 당시 수뇌부가 모두 망각한 결과였다.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군 수뇌부는 한국군을 통솔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이들의 명령은 전·평시 국내외에 배치되어 있는 모든 군부대에 전해진다.

 

명령을 통해 군 통수권을 행사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에 명령을 내리는 통수권의 진정한 주체는 대통령이 아닌 국민이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지닌 군 통수권은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은 국민이 잠시 위임한 권리다.

 

이같은 인식이 있었다면, 군 통수권을 맡긴 국민에게 총을 겨누는 12·3 비상계엄을 단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군대를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도구처럼 인식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김용현 당시 국방부장관과 군 수뇌부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직후인 지난 2024년 12월 4일 새벽 국회가 계엄 해제 요구안을 가결한 뒤 경찰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국방부장관과 장군이 충성해야 할 대상은 대통령이 아니다. 국민과 국가와 헌법이다. 군대가 국민·헌법·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직후 탄생한 근대 국민국가의 기본 원리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 왕정 시절 군대는 왕과 영주에 충성했다. 군대는 그들이 충성을 바치는 군주의 재산과 권력을 지키면서 피지배계층을 다스리는 수단으로서 움직였다.

 

근대 국민국가 군대는 충성 대상이 국민과 국가다. 군주 개인의 지배수단이 아닌 ‘국민 전체의 군대’로서 국민을 대표하는 상비군이다.

 

근대 국민 국가에 속한 국민의 군대를 이끄는 수뇌부는 대통령 개인이 아닌 국민과 헌법,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

 

대통령 개인을 위해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금지되는 행위다. 헌법을 위협하고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해서도 안된다.

 

1년전 12·3 비상계엄 당시 이같은 원칙이 지켜졌다면,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혼란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야경을 찍은 모습. 뉴스1

군사적 관점에서도 12·3 비상계엄은 매우 부적절했다. 계엄은 군대가 감행하는 군사작전과는 성격이 크게 다르다.

 

대부분의 군사작전은 적군을 상대로 한다. 반면 계엄은 국민을 겨냥하는 작전이다. 그만큼 작전 필요성과 당위성, 가능성, 절차에 대한 판단이 훨씬 엄격하게 이뤄져야 한다.

 

1년 전 국내 정세가 군으로 하여금 강압적 행동에 나서도록 할 정도로 위험했을까. 북한의 침공이 임박했거나 테러가 발생한 상황도 아니었다. 계엄이 공감대를 얻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군을 대하는 정치 지도자의 태도, 군인들이 충성해야 할 대상, 군의 정치적 중립과 문민통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계엄의 후폭풍을 극복하려면 군에 대한 개혁과 더불어 건전한 민·군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지도자는 군을 정확히 파악하고 존중하며 헌법에 입각해서 운용하고, 군은 국민·헌법·국가에 충성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정부와 국회, 시민사회는 이를 위한 체계를 정립하고 정착시켜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12·3 비상계엄을 극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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