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뒤 獨 제국물리기술연구소 설립
과학이 공적 전략으로 전환된 순간
세계사 흐름 속 각국 연구소 탐구
국가 경계 넘어선 협력 인프라 조명
연구소의 승리/ 배대웅/ 계단/ 2만2000원
“전기 산업을 지원하고 그 기술적 문제를 해결할 국가 연구소를 만듭시다!” 물리학자이자 기업 지멘스의 창업자였던 베르너 폰 지멘스는 당시 첨단 산업으로 대두하고 있던 전기기술과 시스템의 국제표준을 정하기 위해 1881년 파리에서 열린 제1회 국제전기회의에 독일 대표로 참석하고 돌아온 뒤 이 같은 파격적인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지멘스의 주장은 당시의 상식으론 매우 낯선 것이었다. 당시 학계에선 과학은 호기심을 해결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모두 개인이었고, 연구에 필요한 비용 역시 개인이 부담하고 있었다.
지멘스와 함께 파리 국제전기회의에 참석했던 당대의 석학 헤르만 폰 헬름홀츠도 지멘스의 주장에 공감했다. 막 통일을 이루고 제국을 이룬 상태라 학문과 지식에서 제국으로서 위엄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독일 정부 역시 과학에 대한 지원이 장기적으로 국익이 된다고 판단했다.
산업계와 학계, 정부가 서로 공감하고 지멘스의 자금 및 대지 기부까지 이뤄지면서 1887년 마침내 수도 베를린에 ‘제국물리기술연구소’가 설립됐다. 최초의 근대적 국가 연구소였다. 이는 “제국의 영광을 이루려는 정치적 필요, 첨단기술을 선점하려는 산업적 요구, 학문과 연구를 중시하는 문화적 풍토”가 합쳐진 결과였다.
초대 소장은 헬름홀츠가 맡았다. 이를 계기로 국가는 과학자들을 고용해 연구 프로젝트를 주고, 그 대가로 급여와 연구비를 지급하는 방식이 제도화됐다. 연구소를 중핵으로 과학을 국가 전략의 장기 기능으로 끌어올린 제도적 실험의 시작이었다.
1900년 연구소 소속의 과학자 막스 플랑크는 오늘날 ‘양자가설’로 불리는 흑체복사에 대해 이론적 설명에 성공하면서 온도와 빛의 색상 스펙트럼 사이의 관계를 규명했다. 이를 통해 전구 필라멘트에 열을 가해 빛을 내는 백열전구의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게 됐다. 독일의 과학 성공은 많은 나라를 자극했고, 곧 다른 나라들도 독일 시스템을 적극 수입해 적용하기 시작했다. 1900년 영국 국립물리연구소, 1901년 미국 국립표준국 등이 차례로 설립됐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과 기초과학연구원(IBS) 등에서 15년 이상 연구소 기획과 성과평가, 해외 제도 이식 업무를 담당해온 과학기술정책 전문가인 저자는 신간에서 지난 100여년 동안 세계 주요 연구소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살펴보며 과학 발전과 국가 운명을 어떻게 만들어왔는지를 추적한다.
책은 1887년 독일 제국물리기술연구소에서 시작해 미국의 버클리방사선연구소, 미국항공우주국(NASA) 등을 거치며 연구소의 탄생과 과학의 국가화 과정을 살펴본 뒤, 일본 이화학연구소, 독일 막스플랑크협회, 한국의 원자력연구소 및 한국과학기술연구소로 이어가면서 과학 강국 전략을 펼쳐나간 각국 연구소의 역사를 살핀다. 이를 통해 연구소가 어떻게 국가 전략의 엔진으로 자리 잡았고, 왜 오늘의 기술 경쟁 속에서 결정적 의미를 갖게 됐는지를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정밀하게 배치한다.
“발명 연구는 학문의 이론에 기초해야 하고, 또 그것이 경제적으로 유익해야 합니다. 일본은 결코 모방만 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1913년 6월 도쿄 쓰키지의 한 레스토랑에서 관료와 사업가, 지식인 등 오피니언 리더 120여명이 모인 가운데 유명한 과학자이자 사업가 다카미네 조키치가 “국민과학연구소를 만들자”고 이같이 제안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상대적으로 늦게 서구를 모방해 서둘러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일본의 경우 1910년대 다카미네의 주장을 시작으로 정계와 학계, 재계를 묶어내 1917년 정부 예산으로 이화학연구소를 설립했다. 기초과학을 추격 전략의 핵심으로 삼으려 했다. 일본은 이후 이화학연구소를 필두로 다양한 국책연구소와 민간연구소 등을 설립 운용하면서 세계적인 과학기술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한국의 경우는 또 달랐다. 해방 직후 단전 사태, 기술과 연료의 해외 의존, 냉전과 에너지 공급 불안정은 곧 국가 생존의 문제였다. 법과 조직을 서둘러 만들고 해외 지식과 제도를 도입해가며 산업기반, 전력 안보, 국가 재건을 떠받치는 인프라로 1959년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설립했다. 이는 이후 국가 R&D의 출발점이 됐다.
특히 1966년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설립 및 운용을 통해 수출 중심 산업화를 통한 국가 발전 전략을 확고히 했다. 해외 원천기술을 들여오고, 국내 기업의 생산환경에 맞게 개량해 산업에 곧바로 투입하는 구조였다. 지역을 재편하는 데 기여한 독일의 막스플랑크 모델과 달리, 한국의 추격형 KIST 모델은 산업국가의 골격 자체를 만들고 바꾼 사례였다.
오늘날 연구소는 단순히 한 나라의 연구 공간만이 아니라 지구적 규모의 협력 인프라에 가깝다. 책의 마지막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각국 연구소 간 협력과 연결된 세계의 과학 시대를 담고 있다.
최근 전 세계를 강타한 팬데믹 시기 백신이 이례적으로 빠르게 개발될 수 있었던 것도 미국과 유럽, 아시아 연구소와 기업이 데이터를 공유하고, 플랫폼 기술을 교차 검증하며, 임상과 생산을 국제적으로 분업했기 때문이다. 우주 탐사와 소행성의 충돌 대비 프로그램은 NASA, 유럽우주국(ESA),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 등 각국 연구소가 서로의 탐사선과 관측 능력을 엮어 하나의 공동 체계를 만드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입자 가속기와 중력파 관측기 같은 초거대 실험 장치 역시 이미 단일 국가가 부담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섰다. 기후변화 연구 역시 마찬가지다.
책은 현장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사회학적 시야를 바탕으로 과학과 정책, 제도, 사회를 한 체계 안에서 바라보면서 세계 연구소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엮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하여 앞으로 연구소와 과학이 어디로 가야 할지 묻는다.
“물론 경쟁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과학은 그 경쟁마저 협력의 틀 안에서 조정하고 있다. 이제 질문은 바뀌었다. ‘누가 먼저 발견했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문제를 풀 수 있는가’로. 협력이 곧 실력이고, 네트워크가 곧 실험실이 된 시대가 도래했다. 지금 이 세계는 과학자들의 연대가 만든 공동의 프로젝트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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