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초가서도 기품 묻어나
이젠 폐가로 방치돼 아쉬움 커
장군의 업적 기릴 방안 찾아야
지난달 중순, 나는 경기도 이천시 율면에 있는 어재연(1823~71) 장군 고택을 방문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가을 하늘이 유난히 높고 여름철의 사나운 기운이 살짝 빠진 초가을 햇살이 따사로워 기분 좋은 날씨였다.
장군의 집은 1871년 신미양요 때 보여준 장군의 용맹한 정신만큼이나 기품이 있었다. 볏짚으로 엮은 이엉을 얹은 초가집이 이토록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장군의 집이 야트막한 뒷산 자락이 다소곳이 내려온 터에 자리 잡아, 집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올려다보아야 하는 배치와 함께 바깥을 향해 열려 있는 사랑채의 높다란 대청마루에서 장군이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기도 했다.

어재연 장군이 여기서 태어났다고 하니 이 집은 1800년대 초, 그러니 순조 임금 때 지어졌을 것이다. 집의 전체적인 배치는 북서향으로 넓은 마당을 앞에 두고 사랑채와 안채, 광채가 서로 어울려 안마당을 가운데 둔 ‘ㅁ자’ 형태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사랑채를 바라보고 오른쪽에 있는 대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서면 바른편에 있는 광채를 살짝 막아선 자그마한 쪽담이 사랑채를 향하는 손님의 시선이 여성의 공간인 안채로 향하는 민망함을 방지하고 있다.
멀리서 볼 때 집에서 풍기는 당당한 분위기와는 달리 집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열어보니 영락없는 폐가였다. 사람이 살지 않아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지붕이 새 빗물이 흘렀는지, 검은곰팡이가 벽면 여기저기를 점령하고 있었다. 안채와 광채는 올여름 폭우에 지붕이 무너져 내려 진한 초록색 천막으로 덧씌워져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장군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기분 좋은 가을 날씨에 불쑥 찾아온 당혹스럽고도 민망한 감정이었다.
아마도 내 감정은 신미양요 때 빼앗긴 장군의 ‘수자기(帥字旗)’를 찾으러 2007년 미국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에 있는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을 방문했던 나의 기억 때문이리라. 당시 나는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국제교류과를 맡고 있었다. 장수의 상징인 ‘수자기’는 옛 그림으로만 그 존재가 확인될 뿐 국내에는 실물이 없다. 그러나 수자기를 돌려받고자 한 우리의 바람은 그저 우리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박물관에는 지난 200년 동안 세계 각지에서 미군이 전투로 빼앗은 각국의 깃발 약 250점이 보관되어 있었고 조선의 수자기도 그중 하나였다. 박물관장은 이 깃발들은 전투에서 승리한 결과 획득한 전리품이며 대통령의 명령과 의회의 입법으로 보관하고 있는 미국 재산이라 돌려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신미양요를 바라보는 인식이 그들과 우리는 크게 달랐다. 우리는 강대국이 무력을 앞세운 무단 침략으로 수자기를 약탈해 간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 미국은 인류의 오랜 의식인 전쟁을 통해 정당하게 획득한 전리품으로 여기고 있었다. 전리품은 국제법상 승전국의 재산이다. 현실을 인식한 나는 차선책으로 박물관장을 설득해 ‘10년 장기 대여’ 형식으로 수자기를 국내로 들여올 수 있었다. 우리는 전시를 위해 수장품을 서로 빌려주고 빌리는 것이 ‘박물관의 비즈니스’라는 명분을 내세웠고 미국 측이 이를 수용했다.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수자기를 보고 내가 느낀 감정은 복잡 미묘했다. 절대적인 무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장군의 일념과 끝까지 전투에 임해 용감히 싸운 조선군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조선군의 용맹성은 미국 측의 공식 보고서와 전투에 참여한 미군의 회고록과 편지 등에 잘 나타난다. 당시 미군은 조선군을 가리켜 “의지가 굳센 적”이라고 치켜세우는가 하면 비록 보잘것없는 무기를 가졌지만 “조선군은 호랑이처럼 싸웠다”고 혀를 내둘렀다. “광성보 내부에서 백병전이 치열했고 조선군 마지막 한 사람까지 쓰러지고 나서야 비로소 전투가 끝났다”고도 적었다. 어재연 장군을 비롯해 250명 이상 되는 조선군은 모두 전사했다. 150년 이상 지난 과거였지만 수자기를 보는 순간 나는 당시의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수자기의 실물을 내 눈으로 보았기에 그 느낌이 한층 더 강렬했다.
역사책으로 알았던 신미양요는 수자기를 통해 내 앞에 현실로 나타났다. 프랑스 사회학자 모리스 알박스는 1950년 ‘집단 기억’이라는 논문에서 “기억은 집단의 정체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특히 “먼 과거의 사건일수록 고상한 기념비로 남지만, 가까운 과거는 집단의 감정과 정체성에 직접 작용한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맞는 말이다. 신미양요는 아주 가까운 과거는 아니지만, 그리 먼 과거도 아니다. 기억은 과거를 현재와 연결한다. 개인의 기억은 각자 겪었던 ‘직접 경험’으로 형성되지만, 한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집단 기억’은 앞선 세대로부터 전해 듣거나 교육을 통해 형성된 ‘간접 경험’이다. 따라서 ‘집단 기억’은 물질적인 실체로 뒷받침될 때 더욱 실감 나는 법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를 보고 역사책으로 알게 된 신미양요를 눈앞에 떠올릴 수 있었고, 이번에 본 장군의 고택을 통해 더 가까워졌다.
돌아오는 길에 폭우를 만났다. 맑았던 날씨가 갑자기 캄캄해지더니 앞이 안 보여 운전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동안 참았던 장군의 눈물이 쏟아지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장군의 집을 이렇게 방치하지 말고, 잘 활용하는 방법은 없을까. 국가유산청과 이천시, 혹은 국방부에서 고민해 볼 일이다. 나라를 지키다 가신 장군과 조선군의 용맹함을 역사책에만 묻어두지 말고, 장군의 고택을 통해 미래 세대에게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이게 우리가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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