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나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 때문인지 일부 자료는 그를 이탈리아·스페인 복수국적자인 것처럼 기재했다. 역사학자들은 콜럼버스의 출생지와 상관없이 그가 스페인계 유대인이라는 주장을 편다. 2024년 스페인 세비야의 성당에 안치된 콜럼버스 유해의 유전자(DNA)를 분석한 법의학자들이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오늘날 스페인은 콜럼버스가 1492년 10월 12일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도착한 것을 기려 매년 10월 12일을 ‘콜럼버스의 날’로 지정해 기념한다.

과거 거액을 들여 콜럼버스의 항해를 후원한 스페인이 콜럼버스를 찬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콜럼버스의 항해 덕분에 스페인은 15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해양 강국으로서 유럽은 물론 전 세계에 걸쳐 황금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미국조차 콜럼버스를 ‘신대륙(미국)의 발견자’로 규정하며 영웅처럼 떠받드는 것은 다소 의외다. 오늘날 미국 수도 워싱턴의 공식 행정구역 명칭은 ‘콜럼비아 특별구’(District of Columbia)다. 보통 이니셜을 따 DC로 줄여 부르는데 여기서 ‘콜럼비아’는 콜럼버스의 여성형 명사에 해당한다. 미국에서 매년 10월 두 번째 월요일은 ‘콜럼버스의 날’로 국가적 경축일이자 공휴일이다.
정작 콜럼버스는 자신이 상륙한 북아메리카 땅이 그때까지 유럽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대륙이란 점을 죽을 때까지 몰랐다. 그저 유럽에서 출발해 대서양을 건너 인도까지 가는 최단거리 항로를 그가 발견했다고 믿었을 뿐이다. 콜럼버스는 값나가는 재물을 얻기 위해 북미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수탈했다. 오늘날 그가 뛰어난 항해사보다는 악랄한 식민주의자로 더 널리 기억되는 이유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은 2021년 취임 후 “콜럼버스는 원주민을 탄압하고 학살에 앞장선 인물”이라며 ‘콜럼버스의 날’ 명칭을 ‘원주민의 날’로 바꿔 버렸다.

바이든을 증오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9일 백악관에 따르면 트럼프는 오는 13일을 예전과 같은 ‘콜럼버스의 날’로 선포했다. 그는 성명에서 “최근 몇 년 동안 콜럼버스는 우리 역사를 지우고 영웅을 비방하며 유산을 공격하려는 악랄하고 가차없는 캠페인의 주요 표적이 되어 왔다”며 바이든 행정부 시절 미 전역에서 자행된 콜럼버스 동상 철거와 기념비 파손 등을 맹비난했다. 이어 “나의 지도 아래 그런 시대는 끝났다”며 “콜럼버스는 진정한 미국의 영웅이었으며 우리나라 시민 모두는 그의 불굴의 결단력에 영원한 빚을 지고 있다”고 찬사를 바쳤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과거사 평가를 둘러싼 보수 대 진보의 이른바 ‘역사 전쟁’은 과연 어디까지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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