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올해 과학 분야에서 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데 대해 길게는 50년 전부터 축적된 기초과학 연구 투자가 결실을 보고 있다는 자체 분석이 나왔다. 일본 현지 언론은 올해 노벨상 성과를 보도하며 “과학은 단기간에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이 많다”고 전했다. 단기 성과에 매몰되지 않는 기초과학 연구·투자의 중요성을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8일(현지시간)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노벨화학상은 기타가와 스스무(74) 교토대 특별교수, 리처드 롭슨 호주 멜버른대 교수, 오마르 M 야기 UC버클리대 교수 3명이 공동 수상했다. 앞서 6일(현지시간)에는 면역 연구로 명성을 쌓은 사카구치 시몬(74) 오사카대 특임교수가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사카구치 교수는 메리 브렁코 미국 시스템생물학연구소 박사, 프레드 램즈델 소노마 바이오테라퓨릭스 박사와 함께 이 상을 받았다.

일본 언론은 한 해에 노벨상 수상자가 두 명이 나온 것은 2015년 이후 10년 만이라고 보도했다. 요미우리신문은 9일 일본 학자들의 노벨상 수상을 조명한 사설에서 “같은 해에 일본인 2명이 노벨상 수상자로 정해진 것은 2015년 이후의 일로 경사스럽다”고 전했다. 이 사설은 “사카구치 교수도, 기타가와 교수도 연구가 독창적이어서 초기에는 비판받기도 했다”며 “그런데도 두 사람은 지적 호기심을 쫓아 연구를 이어갔고 과학계 최고의 영예를 손에 쥐었다”고 평가했다. 이 신문은 “과학의 세계는 단기간에 성과가 나지 않는 것이 많다”며 연구 시점에는 어떤 부분이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나중에 응용할 곳이 발견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올해 두 명의 수상자가 나옴에 따라 노벨상을 받은 일본인은 총 30명으로 늘었다. 이 중 3명은 국적을 미국으로 바꿨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대학을 졸업했다. 일본 노벨과학상 수상자만 보면 물리학 12명, 화학 9명, 생리의학 6명이다. 총 27명 중 2000년 이후 수상자가 22명에 달한다. 2000년대 들어 거의 매년 수상자가 나온 셈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이와 관련 “2000년 이후 일본 과학자 수상이 지속되는 양산 시대에 들어갔다”며 21세기 이후 노벨과학상 수상자는 미국 다음으로 많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21세기에 일본 과학자의 노벨상이 급증한 이유와 관련해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과학기술을 재건의 기둥으로 삼았다”며 “일본 수상자는 평균 40세 전후에 성과를 내고 20∼30년 후에 상을 받았다”고 짚었다. 닛케이는 일본에서 1995년 과학기술 진흥을 국가 책임으로 정한 ‘과학기술기본법’이 만들어졌다며 “2000년까지 제1기에 17조엔(약 158조원), 제2기와 제3기에도 20조엔(약 186조원) 이상의 국비가 투입됐다”고 설명했다.
일본 언론의 진단처럼,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나 단기 산업기술화에 급급하지 않고 과학자의 호기심을 쫓는 연구는 많은 이들이 노벨과학상 수상 비결로 꼽는 요인이다. 인류에 이바지한 과학기술 분야를 열어젖힌 선구자에게 상을 주는 것이 노벨상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 연구로 202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커털린 커리코도 과거 주위에서 거의 인정받지 못했지만 ‘치료용 mRNA’ 연구라는 외길을 고수했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커리코는 과거 mRNA를 주제로 연구 보조금을 한 번도 받지 못했고 부교수 승진에도 실패했다.
국내에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없는 원인 중 하나로도 단계별로 가시적 성과를 요구하는 정부 지원 방식이 꼽혀 왔다. 그간 과학·산업·정책 등 국내 전 분야에서 개척자(퍼스트 무버)보다 ‘1등 추종자’(패스트 팔로워) 전략에 무게가 실렸던 것도 주요 요인이다. 한국 기초과학 투자가 양적 성장을 한 역사가 길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과학계 노벨상 수상자가 연구에 착수해 결과물을 얻기까지는 평균 19.1년이 걸렸다. 이 연구결과가 학계에서 검증 받는 데는 10.7년이 소요됐다. 노벨상 수상이라는 영광을 얻기까지는 그만큼 장기전을 감내해야 하는 셈이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이같은 점이 지적됐다. 지난해 10월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한국과학기술원(KAIST) 대상 국정감사에서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은 이상휘 국민의힘 의원으로부터 노벨상 수상자 배출을 위해 정부가 지원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의를 받고 “정부가 그동안 많이 지원했지만 집중적 양성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보다 간섭 없이 장기연구를 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 총장은 “노벨상은 외국이 하던 것을 더 발전시킨다고 해서 받을 수 없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연구해야 20∼30년 후에 받을 수 있다”며 “우리는 그동안 외국에 있는 기술을 한국화해서 국가 산업을 발전시키는 쪽에 중점을 둬 왔기에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이) 늦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그럼에도 현재 젊은 연구자들이 새로운 도전을 많이 하고 있다”며 “앞으로 가능성이 있다”고 희망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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