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인 식품의약국(FDA)이 최근 새 낙태용 복제약(제네릭)을 승인하자 일부 보수 진영에서 거센 반발이 일고 있다. 백악관은 뒤늦게 FDA의 ‘미페프리스톤’ 복제약 승인은 법에 따른 조치일 뿐이라며 수습에 나섰지만 분노는 잦아들지 않는 모양새다.
낙태약을 둘러싼 공방은 세계적으로 첨예하다. 한국 정부도 ‘임신 중지 약물’ 도입을 국정 과제로 확정했지만 일부 시민·종교단체와 의료계를 중심으로 반발이 만만치 않아 실제 제도화까지는 진통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美 FDA, 낙태약 승인…“법 따랐을 뿐”
7일(현지시간) 미국 정치전문매체 더힐은 공화당 지지층이자 지난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을 도운 낙태 반대 단체들이 FDA의 미페프리스톤 복제약 승인 결정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FDA는 연방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정지) 하루 전날인 지난달 30일 미국 제약사 에비타 솔루션이 개발한 미페프리스톤 복제약을 승인했다. 미페프리스톤은 먹는 낙태약으로 세계보건기구(WHO)가 필수 의약품으로 지정했으며 지난해 기준 100여개국에서 사용 중이다.
미국은 2000년부터 20년 넘게 미페프리스톤을 시판하고 있다. 이후 FDA는 2019년 미국 제약사 젠바이오프로의 미페프리스톤 복제약을 처음 승인했고 이번에 에비타 솔루션의 두 번째 복제약을 승인했다. 복제약은 특허가 만료된 약과 동일한 성분으로 만들어 효능의 동등성을 입증하면 허가된다.

백악관과 FDA는 이번 미페프리스톤 복제약 승인은 정치적 문제와 상관없이 법 절차를 준수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앤드류 닉슨 보건복지부 대변인은 성명을 내고 “FDA는 복제약의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데 있어 매우 제한된 재량권을 갖는다”며 “복제약이 브랜드 의약품과 동일하다는 점이 입증되면 반드시 신청을 승인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도 “FDA의 이번 승인을 (정부가) 임신 중지 의약품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며 “그들은 단지 법을 준수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레빗 대변인은 이어 “보건복지부 장관은 복제약 허가 신청을 받으면 해당 의약품이 오리지널 의약품과 동일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정부 해명에도 보수층 분노 “납득 못해”
하지만 낙태 반대 단체들의 반발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이들은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과 마틴 마카리 FDA 국장이 임신 중지 의약품 안전성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한 지 2주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승인이 이뤄졌다고 지적하며 “실망스럽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의 생명을 위한 학생들(Students for Life of America)’의 회장인 리스찬 호킨스는 성명을 내고 “FDA의 승인은 트럼프 대통령직에 ‘오점’을 남기는 일”이라고 날을 세웠고, 미디어·정책 담당 대변인 크리스티 햄릭은 “FDA가 실질적인 심사나 검토를 할 수 없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관련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쏘아붙였다.
익명을 조건으로 한 낙태 반대 운동가는 더힐에 “‘손이 묶여서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그들(FDA나 정부)의 주장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낙태 반대 단체인 SBA 프로 라이프 아메리카의 켈시 프리처드 정치 홍보 책임자는 “공화당은 낙태 반대 유권자들 없이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며 “우리는 이 나라에서 거대한 유권자 집단이고 공화당이 매년 승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간 반(反)낙태 기조를 보여왔다. 2022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여성의 낙태권을 헌법상의 권리로 보장했던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파기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자신의 공로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재임하던 시절 보수 성향 대법관 세 명을 임명하면서 대법원 이념 구도를 보수 우위로 재편했다는 논리다. 이로 인해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한 뒤 미국 여성들 사이에서는 낙태약을 사재기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중간선거 앞둔 트럼프, 이번엔 어떤 입장?
트럼프 대통령은 1999년 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는 자신을 ‘낙태권에 매우 찬성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으나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된 2016년에는 낙태권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낙태권 반대가 여성·중도층의 이탈로 이어져 대선 패배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한 뒤에는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못하며 혼선을 키웠다.
사실상 모호한 입장을 취해온 셈인데 그는 지난해 11월 대선을 앞두고 낙태권에 관해 처음으로 공식적인 입장을 내놨다. 지난해 4월에는 전국적으로 일률적인 낙태 금지 기준을 도입하기보다 각주(州)별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을 내비쳤고 같은해 7월에는 공화당 정강정책에서 40년간 담아온 ‘연방 차원의 낙태 금지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문구를 삭제했다. 하지만 이는 당 안팎에서 회피성 발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당시 행보는 중도층 표심을 의식한 정치적 전략으로 읽힌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이후 낙태를 지원하는 단체에 자금 지원을 제한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등 다시 강경한 입장으로 선회했다.
문제는 내년에 미국이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고려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향후 낙태에 관해 또 어떤 입장을 보일지는 미지수다.
트럼프 대통령과 달리 아내인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는 낙태권을 옹호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멜라니아 여사는 자신의 회고록에 “여성이 임신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신념에 의거해야 하며 정부의 어떤 압력이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썼다.
에비타 솔루션은 이번에 승인받은 미페프리스톤 복제약을 내년 1월쯤 출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회사는 “수십 년간 안전하게 사용돼 온 합리적인 가격의 의약품”이라며 “임신중지가 필요한 환자들의 선택의 폭이 넓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도 ‘임신 중지 약물’ 도입…진통 불가피
국내에서는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지만 6년 가까이 입법 공백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현대약품이 지난 2021년부터 몇 차례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 복합제인 ‘미프지미소’의 품목허가를 신청했지만 자료보완 요구 등에 답하지 못했고 결국 자진 철회했다.
최근 이재명 정부는 임신중지 법·제도 개선과 임신 중지 약물 도입을 국정 과제로 확정했다. 국회도 임신중지 후속 입법 논의에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남인순·이수진 의원은 지난 7월 약물 임신 중지를 허용하는 내용의 ‘모자보건법 일부개정법률안’을 각각 발의했다.
그러나 반발 움직임도 만만치 않은 만큼 본격 추진까지는 상당한 논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낙태 허용이 생명 경시 현상을 부추기고 의료 윤리·의약품 안전성 등의 측면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달 28일 ‘국제 안전한 임신 중지의 날’을 맞아 위원장 명의의 성명을 내고 “안전한 임신중지권 보장을 위한 입법 공백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인권위는 “WHO가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하고 세계적으로 100여개 가까운 나라가 안전한 임신 중지의 방법으로 승인해 사용하고 있는 임신 중지 약물조차 국내에 도입되지 않았다”며 “안전한 임신 중지 의료서비스에 대한 접근 제한과 음성적으로 거래되는 임신 중지 약물로 인해 여성의 건강권이 위협받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인권위는 “국회는 헌법재판소 결정의 취지에 따라 낙태와 관련된 법률을 조속히 제정해야 하고 정부는 가능한 행정적 조치를 통해 실질적인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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