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소야대 위기 때는 ‘동거정부’로 타개
극좌·극우 양극화 시대에 그마저 불가능
“원내 과반 다수파 없이는 정치도 없어”
‘그 유명한 제5공화국 헌법도 이제 운을 다한 것일까.’
한때 헌법을 고쳐 정치를 바꾸는 데 성공한 대표적 국가로 지목된 프랑스가 이제 헌법에 발목이 붙잡혀 통치가 불가능한 나라로 전락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발탁한 새 총리가 취임 후 1개월도 안 돼 낙마하며 프랑스 정치 제도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총리 등 내각의 존속을 의회 신임에 맡긴 헌법 규정과 의회에 확고한 다수파가 없는 정치 현실이 충돌하며 좀처럼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27일 만에 불명예 퇴진한 ‘최단명’ 총리
6일(현지시간) BBC 방송과 AFP 통신 등에 따르면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프랑스 총리가 이날 오전 마크롱에게 사표를 제출해 수리됐다고 엘리제궁이 밝혔다. 지난 9월 9일 마크롱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고 불과 27일 만의 일이다. 1959년 프랑스 제5공화국 출범 이후 가장 단명(短命)한 총리로 기록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르코르뉘의 조기 퇴진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현재 39세인 르코르뉘는 마크롱의 핵심 측근으로 대표적 충성파에 해당한다. 2017년 5월 마크롱 행정부 출범 후 줄곧 내각의 요직을 지켰으며 최근까지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그가 총리에 기용됐을 때 야권에서 ‘민심은 변화를 원하는데 마크롱은 현상 유지에만 급급하다’는 비난이 쏟아진 이유다.
지난 5일 르코르뉘의 제청으로 마크롱이 단행한 새 내각의 장관 인선도 구설에 올랐다. 말이 ‘새 내각’이지 앞서 의회 불신임으로 물러난 프랑수아 바이루 전 총리 밑에 있던 장관들이 대부분 자리를 지켰다. 그나마 교체가 이뤄진 재무부 장관(롤랑 레스퀴르)과 국방부 장관(브뤼노 르메르)도 마크롱에 충성해 온 인물들로 현 정부 들어 고위직을 거쳤다. 야권이 “전형적인 돌려막기 인사이자 회전문 인사”라며 이르면 7일 하원에 총리 불신임안을 제출해 표결에 부치는 방안을 추진하자 르코르뉘로서도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것이다.

◆여소야대 위기 때는 ‘동거정부’로 타개
“프랑스는 총리가 너무 자주 바뀌어 그들 중 내가 기억하는 이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프랑스 임시정부 지도자 샤를 드골에게 던진 말이다. 드골은 모욕감을 느꼈으나 꾹 참았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프랑스 제3공화국(1870∼1940)과 4공화국(1946∼1958)은 합쳐서 82년간 내각이 120번 넘게 교체될 만큼 정치가 불안했다. 천하의 드골도 ‘팩트’(사실)에 기초한 루스벨트의 지적에 토를 달 순 없었다.
대신 드골은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의 개헌을 추진하고 나섰다. 드골이 정권을 쥔 1958년 제5공화국 헌법 초안이 공개됐다. 대통령과 총리 둘 다 강한 권한을 갖는 독특한 정부 형태를 놓고 ‘반(半)대통령제’, ‘이원집정제’ 등 평가가 쏟아졌다. 수십년간 제도를 시행해보니 한 가지 점은 확실해졌다. 의회가 여대야소일 때는 대통령제, 여소야대일 때는 의원내각제처럼 운용된다는 것이다.
특히 여소야대 국면에선 원내 과반 다수당인 야당이 총리와 장관들을 배출하고 국정을 이끄는 가운데 정작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은 무력화했다. 이를 ‘동거(同居)정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본질은 내각제에 가깝다. 드골이 이런 상황까지 예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통령제의 최대 약점인 여소야대 정국의 교착을 돌파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원내 과반 다수파 없이는 정치도 없어”
2000년 프랑스는 5공화국 헌법을 일부 고쳐 대통령 임기를 기존 7년에서 하원의원과 같은 5년으로 단축했다. 아울러 대선 직후 하원 총선을 실시하도록 선거 시기도 조정했다. 이 같은 개헌의 목표는 동거정부 출현을 막는 것이었다. 대통령을 배출한 여당이 가급적 하원 다수당 지위도 겸해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2022년 대선에선 마크롱이 승리해 재선 및 연임에 성공한 반면 총선은 마크롱의 여당이 하원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5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하원의원 과반의 지지를 못 얻은 소수파 정부가 출현한 것이다. 마크롱은 2024년 여름 하원을 전격 해산하고 재선거를 실시하는 승부수를 띄웠으나, 이번에도 여당은 원내 2당에 그치고 좌파 야당들의 연합체인 신인민전선(NFP)이 1위로 올라섰다. 3위를 차지한 극우 성향 국민연합(RN)까지 3개 주요 정치 세력 중 누구도 단독으로 원내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극도의 정치적 혼란이다. 마크롱의 8년 6개월 남짓한 재임 기간 벌써 7명의 총리가 출현했다 퇴장하고 이제 8번째 총리 등판을 앞두고 있다. 과거 루스벨트의 비웃음을 산 3·4공화국 시절 정부의 난맥상으로 퇴행한 셈이다. 프랑스 정계 일각에선 “5공화국 헌법은 이제 운이 다했다”며 “새로운 정치 제도 도입을 모색해야 할 때”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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