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 출석하느라 경찰서에 못 왔다는 이유로 내게 수갑을 채웠다.”
2일 오후 4시쯤 서울 강남구 대치동 자택 인근에서 체포된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은 경찰서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수갑을 찬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법원이 발부한 체포영장을 집행해 이 전 위원장을 연행했다. 이 위원장에겐 공직선거법 및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가 적용됐다. 전날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설치법이 공포되며 자동 면직된 지 하루 만이었다.
곧바로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이 전 위원장은 48시간 뒤인 4일 오후 법원의 체포적부심 인용 결정으로 석방됐다. 이 전 위원장은 정권 비판 발언을 한 전직 고위공무원을 대상으로 경찰이 “과잉 수사”했다고 강력 반발했다.
◆ 유튜브 출연·SNS 게시글이 범죄 혐의로
5일 세계일보가 입수한 체포영장에 따르면 경찰이 이 전 위원장에게 적용한 혐의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국가공무원법상 정치운동 금지 위반이다. 이 전 위원장은 방통위 2인 체제 논란으로 탄핵소추돼 직무 정지 중이던 지난해 9월부터 10월 사이 펜앤마이크TV 등 우파 성향 유튜브에 출연해 “민주당이나 좌파 집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집단”이라고 발언했다. 또한 “(방통위) 2인 체제를 만든 것은 민주당의 고의”, “민주당 야당 의원들은 다수의 힘을 이용해 국회를 장악하고 의혹을 확대 재생산한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
둘째는 공직선거법상 공무원의 선거 개입 금지 위반이다. 이 전 위원장은 올해 3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민주당 의원들과 이재명 (당시) 대표도 직무유기 현행범”이라는 글을 게시했다. 4월6일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나온 발언이었다. 비슷한 시기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현안 질의에서도 “민주당이 저를 탄핵시켰으니까요”라고 했다.
민주당은 지난 4월 이 전 위원장의 이러한 발언들이 선거 개입에 해당한다며 영등포경찰서에 고발했다.

◆ 경찰, “6차례 소환 불응” vs 이진숙, “과잉수사”
경찰은 이 전 위원장이 방통위원장이라는 정무직 공무원 신분으로 특정 정당을 반대하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발표하고, 선거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판단했다.
경찰 관계자는 “8월12일부터 9월19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서면으로 출석 요구서를 발송했으나 불응했다”고 설명했다. 출석 요구서는 등기우편 2회, 일반우편 4회로 발송됐고, 팩스와 전화 등 여러 경로로도 출석을 요청했다는 것이 경찰 측 주장이다.
특히 지난달 27일 오후 2시로 예정된 조사에 이 전 위원장이 출석하지 않자 체포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이 전 위원장이 출석 요구에 불응했기 때문에 체포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이 전 위원장 법률대리인 임무영 변호사는 경찰의 체포를 “과잉 수사”라고 규정하며 반발했다.
임 변호사는 “9월9일 오전 경찰 수사과장과 27일 출석해 조사받기로 합의했는데, 경찰이 그날 출석 요구서를 보냈고 12일, 19일에도 출석 요구서를 발송했다”며 “출석 일정이 확정된 상황에서 소환 불응이라는 거짓 외관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27일 불출석에 대해서는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는 입장이다. 이 전 위원장은 당일 국회에서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설치 법안 관련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에 참석해야 했고, 불출석 사유서를 경찰에 제출했다는 것이다.
임 변호사가 공개한 불출석 사유서에는 “피의자는 방통위원장으로서 방통위 관련 법안에 대해 국회의원들의 의견을 들을 임무가 있다”며 “조사 일정을 다시 잡아달라”고 요청한 내용이 담겼다.
또한 “등기우편을 수령한 적이 없고, 나머지 우편도 출석 일자가 지난 뒤에 받았다”고 주장했다.
◆ 법원 “체포 적법하지만 석방해야”
이 전 위원장은 체포된 지 약 50시간 만에 석방됐다.
서울남부지법 김동현 영장당직 부장판사는 4일 체포적부심을 인용해 이 전 위원장을 석방했다. 체포적부심은 체포된 피의자가 법원에 체포의 적법성과 필요성을 다시 판단해달라고 청구하는 제도로, 법원이 이를 인용하면 즉시 석방된다.
재판부는 경찰의 체포가 적법했다고 판단하면서도, 체포 상태를 유지할 필요성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재판부는 “헌법상 핵심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이유로 하는 인신구금은 신중히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미 상당한 정도로 피의자에 대한 조사가 진행됐고, 사실관계에 대한 다툼이 없어 추가 조사 필요성도 크지 않다”며 “심문 과정에서 피의자가 성실한 출석을 약속하고 있는 점”을 석방 이유로 들었다.
다만 김 부장판사는 경찰의 체포 자체는 정당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피의사실의 범죄 성립 여부에 관해 다툼의 여지가 상당하기는 하나 수사의 필요성이 전면 부정된다고까지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이어 공소시효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수사기관이 신속히 소환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김 부장판사는 “피의자가 수사기관의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라며 “수사기관이 피의자가 재직 중이던 기관으로 유선 및 팩스로 여러 차례 출석 요구 사실을 알렸던 점에 비춰 피의자가 출석 요구 사실을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27일 국회 출석을 이유로 조사에 불출석한 것에 대해서도 “과연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남는다”며 “변호인이 제기하는 일부 의문점에 충분한 경청의 필요성이 있음에도 체포의 적법성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이 전 위원장은 4일 오후 6시47분 영등포경찰서를 나서며 수갑 없이 걸어나와 “경찰, 검찰이 씌운 수갑을 사법부가 풀어줬다”며 “대한민국 어느 한구석에는 민주주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재체포 어려워… 불구속 수사로 전환 전망
서울경찰청은 이 전 위원장이 석방된 후 입장문을 통해 “법원은 수사의 필요성과 체포의 적법성은 인정되지만, 체포의 필요성 유지, 즉 체포의 계속성이 인정되지 않아 석방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체포 자체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경찰은 연휴 이후 이 전 위원장을 다시 소환해 3차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그러나 재체포나 구속영장 신청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형사소송법 제214조의3은 체포적부심으로 석방된 피의자는 도주하거나 증거를 인멸하지 않는 한, 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경우가 아니면 같은 범죄사실로 재체포할 수 없도록 규정한다.
이 전 위원장은 적부심사에서 앞으로 성실히 출석하겠다고 약속했고, 법원도 이를 석방 이유 중 하나로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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