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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C 무대에 던지는 평화의 질문 [종교 칼럼]

입력 : 2025-09-15 17:07:44 수정 : 2025-09-15 17:07:43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hulk1983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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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 말 경북 경주에서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회의가 열린다. 우리나라는 1989년 출범 때부터 참여했다. 매년 주요 국가를 돌아가며 열리는 APEC에서 한국은 이번에 세번째로 의장국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게 된다. 

 

경주 APEC에서는 여러 장관회의와 고위급 대화가 예정돼 있다. 1993년부터 매년 열리는 APEC 정상회의에서는 각국의 경제협력과 비전 선언이 이뤄진다. 이재명 대통령도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열리는 경주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해 비전을 제시하고 의장국 대표로서 중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APEC 공식 회원국 중에 ‘브루나이 다루살람국(Brunei Darussalam, 평화의 나라 브루나이)’이라는 나라가 있다. 생경한 이름의 국가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APEC 창립 회원국이다. 말레이시아 사라왁주에 둘러싸인 이 나라는 이슬람권 절대군주국이자 산유국으로서, 동남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다.

 

이 나라의 이름이 지닌 뜻에 마음이 머물 수밖에 없다. 평화가 한 나라의 공식 이름 속에 새겨져 있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가. 열대 우림이 우거지고, 황금빛 돔의 모스크가 찬란하게 빛나는 이 작은 나라에서는 국민 대부분이 의료와 교육을 무상으로 누리며 조용히 살아간다. 높은 수준의 1인당 GDP를 기록하고 있다. 범죄율은 낮고, 정치는 안정도 있고 종교적 갈등은 없다. 절대군주제지만 사회질서가 잘 유지되고, 인간개발지수(HDI)도 동남아시아에서 최상위권에 속한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고요한 강을 따라 수상가옥이 이어지고, 공공장소에서는 예의 바른 복장이 당연시된다. 단정하고 조심스러운 삶이 도시 전체를 감싸는 듯하다.

 

브루나이는 세계가 점점 더 거칠어지는 이 시기에 고요한 울림을 주는 ‘평화’의 표본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된다. ‘평화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곳이 과연 평화로운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La Paz)’. 이름은 ‘평화’지만 잦은 정치 시위와 쿠데타로 불안정한 역사를 반복해왔다. ‘예루살렘(Jerusalem)’.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지녔으나 그 땅은 오히려 세계에서 가장 뿌리깊은 종교 갈등과 분쟁의 상징이 되었다. 평화는 이름을 가졌다고 보장되지는 않는다. 진심과 구조, 지속가능한 조건이 갖춰질 때에야 비로소 평화가 숨 쉴 수 있다.

 

다른 두 나라를 떠올려본다. 북한과 베트남이다. 둘 다 한때 공산권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형제처럼 묶였고, 폐쇄성과 전쟁을 공유한 나라들이다. 지금의 현실은 사뭇 대조적이다. 북한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나라다. 그곳에서는 이념이 사람보다 앞서고, 개인의 자유와 생명은 국가 체제라는 이름 앞에 희생당한다. 기아는 사라지지 않고, 탈북자는 끊임없이 생기며, 북한 당국은 주민의 삶을 수단처럼 다룬다. ‘평화’라는 단어는 선전 구호 속에서만 존재한다.

 

반면에 베트남은 유엔으로부터 ‘평화의 도시 상’을 받을 만큼 발전한 나라가 되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시장을 개방하고 세계와 손을 잡았다. 여성과 소수자를 위한 정책과 포용적 도시 행정을 실천하며 변화해 왔다. 전쟁을 끝낸 나라는 평화를 선택했고, 그 평화는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있다.

 

두 나라의 대조된 모습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평화는 타고나는가, 아니면 선택하고 길러내는 것인가.

 

다시 브루나이를 생각한다. 그곳은 전쟁의 폐허도, 국제정치의 긴장도 겪지 않았다. 대신 조용한 통치와 종교적 질서를 통해 내부의 평화를 지키고 있다.

 

평화의 모양은 다를 수 있다. 브루나이는 ‘질서 있는 안정’의 평화를, 베트남은 ‘변화와 포용’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 북한은 ‘억압 속 침묵’이라는 이름의 가짜 평화를 연기한다.

 

진정한 평화란 단지 총성이 멈춘 상태가 아니라, 사람이 자유롭게 숨 쉬고 말하며 꿈을 꿀 수 있는 상태다. 그 평화가 APEC이라는 협력의 무대 위에서 더욱 넓게 퍼져나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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