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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우칼럼] 극단주의와 양극화, 무너지는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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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9-14 22:56:50 수정 : 2025-09-14 22:5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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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든 우리든 정치 문법 변모
극우적 성향 ‘앵그리 영맨’ 활개
대화와 타협 쪼그라든 현실 속
엄정한 과학적 분석 고민해야

최근 유럽 연구자들과 함께 호라이즌 유럽 프로젝트 제안서를 준비하면서 극단주의·양극화·혐오에 관한 방대한 연구를 접할 수 있었다. 호라이즌 유럽은 EU가 대규모 연구 자금을 지원하는 사회문제 해결형 연구 프로그램이다. 정치가 정책 갈등을 넘어 상대를 혐오하는 ‘감정적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거나, 극우 정당이 힘을 얻자 주류 정당도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정책을 편다거나, 정치인이 던지는 ‘위험한 말’이 곧잘 선동과 폭력을 낳는다는 연구들이다. 사람들은 가짜 뉴스에 쉽게 끌리고, 이런 행태를 섣불리 교정하려 들면 오히려 반발을 부른다는 연구도 있다.

돌아보면 우리의 정치와 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국회는 정책 갈등과는 전혀 상관없는 감정적 싸움터로 전락한 지 오래다. ‘종북좌파’, ‘괴물’, ‘극우’ 같은 말들은 단순한 수사학에 그치지 않는다. 각 진영의 집단적 결집을 강화하고 지난 1월 서부지법 사태에서 보듯 폭동으로 번지기도 한다. 정치인의 ‘위험한 말’이 집단행동을 자극하고 폭력을 부추겼다는 평가도 있다. 대중은 음모론에 열광한다. 이를 합리적 추론이라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유튜버에게 끌린다. 이들에 대한 합리적 비판조차 ‘나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 격노한다. 이런 우리의 자화상은 유럽의 정치 풍경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사회학

몇 달 전 스웨덴 룬드대학을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20여명의 연구자가 발언을 마쳤을 때 가장 많이 반복된 화두는 ‘앵그리 영맨’, 즉 사회를 불신하고 격노하는 젊은 남성이었다. 연구자들은 이들이 현 우파 연합 정부 등장의 중요한 배경이라고 입을 모았다. 스웨덴은 8년간 이어진 사회민주당 정부가 2022년 총선에서 물러나고 중도우파가 극우 세력의 외부 지원을 받는 새로운 연정 정부를 출범시켰다. 이들은 스웨덴의 티도 성(城)에 모여 이른바 ‘티도 협약’을 맺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협약은 없었지만, 윤석열정부의 배후에 젊은 남성들이 있었다. 이들 중 극우적 성향의 ‘앵그리 영맨’이 전면에 나섰던 것도 사실이다.

서구든 한국이든 정치의 문법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온라인과 일상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소통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그 바탕에는 온라인 소통의 폭발적 증가가 있다. 여기에 사실과 거짓을 교묘히 뒤섞은 밈이 쏟아져 나오고 인공지능(AI)이 그것들을 더 빠르게, 더 넓게 실어 나르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대화와 타협의 문법은 무너지고, 사회는 ‘나와 남’, ‘내 편과 네 편’으로 빠르게 갈라졌다. 전혀 새로운 감정, 배척, 편견과 조롱의 태도가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믿음이 온전할 리 없다. 대화와 타협의 언어는 쪼그라들었다. 민주주의의 회복력에 대한 의심도 커졌다. 극단주의에 기댄 채 동맹까지 저버리는 트럼프의 모습을 보면 이 모든 게 단박에 이해가 간다. 이 혼돈 속에서 유럽은 냉정한 분석과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호라이즌 유럽이다. 극단화·양극화·혐오에 대응하는 연구와 활동가 네트워크에 자금을 지원하고, 증거 기반 분석이 정책과 옹호 활동으로 이어지도록 설계한다. 학자·정책가·시민사회가 함께 해법을 모색하는 협력의 플랫폼이다.

우리도 이제 이런 길을 모색해야 한다. 연구자들은 극단화, 양극화라는 불편한 현실 속에서 오히려 연구실 안으로 숨어든다. 사회적 책임은 방치되고 엄정한 과학적 분석은 뒷전으로 밀린다. 그러니 증거 기반 정책도, 설득력 있는 시민사회의 옹호 활동도 싹트기 어렵다. 인용 수에 매달리기보다 어떻게 과학적 분석 역량을 동원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연구재단을 중심으로 정부가 이를 뒷받침하고 지원해야 함은 물론이다. ‘호라이즌 한국’이 필요한 이유이다. 극단의 분열과 젊은 세대의 급진화에 제동을 걸고, 회복력 있는 민주주의를 만들 하나의 기회가 될 것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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