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에서 군국주의 일본이 패망하고 3년 가까이 지난 1948년 5월10일 미국 군정 치하의 한국에서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그렇게 뽑힌 의원들은 같은 해 5월31일 모여 대한민국 국회 개원식을 열고 독립운동가 이승만 박사를 국회의장으로 뽑았다.
초대 국회는 신생 공화국 대한민국의 헌법을 만들어야 할 역사적 책무를 짊어졌다고 해서 ‘제헌(制憲)국회’로 불렸다. 이 국회가 제정한 헌법에 따라 이승만 박사를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8월15일 공식 출범했다.

입법부, 행정부와 더불어 삼권 분립의 한 축인 사법부는 어땠을까. 실은 ‘대법원장인 법관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국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라고 규정한 제헌헌법 제78조에 따라 1948년 8월5일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이 이미 초대 대법원장으로 확정된 상태였다.
그런데 1945년 일제강점기 종료 후 한국에서 사법권을 행사해 온 미 군정이 우리 측과 업무를 인수인계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시일이 소요됐다. 결국 대법원은 1948년 제헌국회 개원(5월31일)이나 정부 수립(8월15일)보다 좀 늦은 9월13일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2015년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은 바로 이 점을 감안해 매년 9월13일을 ‘대한민국 법원의 날’로 정해 기념하기로 했다. “가인의 대법원장 취임으로 명실상부한 사법 주권 행사가 가능해진 것을 기리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생겨난 지 10년이 넘었으나 아직 일반 국민은 물론 법조인들 사이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모습이다. 양 대법원장 시절은 물론 그 이후의 김명수, 그리고 현 조희대 대법원장 임기에 들어서도 사법부 내부에, 또 사법부와 정치·행정 권력 간에 평지풍파(平地風波)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2일 열린 제11회 법원의 날 기념식 역시 정치권 일각에서 추진 중인 이른바 ‘내란 사건 특별재판부’를 둘러싼 위헌 논란 속에 대중의 이목을 끌지 못한 채 지나치고 말았다.
우리 헌법상 삼권 분립 원칙과 별개로 입법·행정·사법 삼권 가운데 사법의 힘이 가장 약한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권 분립의 핵심은 곧 사법권 독립의 보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조계 신망이 두터웠던 한승헌(2022년 타계) 전 감사원장은 2015년 법원의 날 제정에 즈음해 “(법원의 날이) 올바른 사법의 소임 수행을 다짐하며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기회가 돼야 한다”고 충고한 바 있다. 요즘처럼 법원 안팎이 혼란한 시대에 가인이 살아 있다면 ‘올바른 사법의 소임’ 그리고 ‘주권자인 국민이 사법부에 바라는 뜻’과 관련해 우리에게 어떤 조언을 들려줄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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