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아르강 지류 셰르강 위에 건설/ ‘닻을 내린 배’로 불리며 아름다운 자태 자랑/앙리 2세 총애 디안과 왕비 카트린의 암투 흥미진진/다리 위에 얹은 웅장한 2층 구조 갤러리 눈길/최초 설계 브리소네부터 역대 고성 주인은 모두 여인

화려한 꽃으로 장식한 르네상스식 정원. 한낮의 더위를 누그러뜨리며 푸른 하늘을 향해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 올리는 중앙 분수. 그 너머 푸른 셰르강을 가로지르며 그림처럼 서 있는 우윳빛 고성은 정원의 주인이던 귀족 부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그대로 닮았다. ‘여인들의 성’으로 불리는 루아르 고성 슈농소(Chenonceau). 정원을 지나 정교한 조각이 새겨진 문을 열면 성을 거쳐 간 여인들의 화려하면서도 굴곡진 삶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강 위에 세운 유일한 고성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프랑스 루아르의 앙부아즈성과 클로뤼세를 떠나 남쪽으로 20분가량 차로 달리자 루아르강 지류인 고요한 셰르강 위에 그림처럼 떠 있어 ‘닻을 내린 배’로 불리는 슈농소성이 나온다. 루아르의 많은 고성 중 강 위에 건설한 유일한 성이며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어우러지는 빼어난 건축미가 돋보인다. 여기에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왕비 카트린 드메디시스와 앙리 2세가 총애한 여인 디안 드 푸아티에가 왕의 사랑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암투를 벌인 흥미진진한 역사까지 더해지면서 슈농소성은 루아르 고성 투어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매표소를 지나면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솟아오른 장대한 플라타너스가 늘어선 진입로 그랑드 알레가 이어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아치처럼 늘어져 그늘을 만드니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이름 모를 새소리 즐기며 길 끝까지 걸어 스핑크스 석상을 지나면 슈농소성 양쪽으로 한낮의 햇살을 받아 눈부신 정원이 펼쳐진다. 동쪽이 디안, 서쪽이 카트린의 정원으로 마치 지금도 서로를 질투하듯 마주 보고 있다. 두 여인의 스타일만큼 정원은 뚜렷하게 구별된다. 1.2㏊ 규모 디안의 정원은 넓고 개방적이며 대칭미를 강조한다. 중앙 분수와 화려한 꽃밭으로 꾸며 왕의 총애를 과시하는 디안의 의도를 담았다. 카트린의 정원은 5500㎡로 훨씬 작다. 디안의 정원이 슈농소성을 대표하는 공식 정원이라면 카트린의 정원은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한 왕비가 사색하며 휴식하던 개인 공간이다.


직사각형 모양 디안의 정원으로 들어서자 가운데 분수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은 길이 눈에 띈다. 직삼각형 8개 구획으로 나눴는데 이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식 정원이다.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 소형 관목 산톨리나를 섬세한 소용돌이 모양으로 장식했고 주목, 노박덩굴, 회양목 등의 다양한 관목도 자란다. 특히 히비스커스 100여그루가 심겨 여름이면 화사하게 변신한다. 여기에 피튜니아, 달리아, 라벤더가 알록달록 피어 마치 천상의 화원을 거니는 것 같다. 셰르강 범람 때 정원을 보호하기 위해 화단 테라스를 높게 설계한 점이 눈에 띈다. 디안이 얼마나 이 정원에 정성을 쏟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테라스는 봄부터 늦가을까지 피는 하얀색 덩굴장미 아이스버그로 장식했다.


반면 카트린의 정원은 규모는 작지만 세련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슈농소성 서쪽 면을 조망하는 정원은 가운데 우아한 원형 연못을 중심으로 구형으로 다듬은 회양목이 포인트처럼 놓였다. 연한 핑크빛 클레르 마탱 장미를 격자 형태로 가지치기했고, 줄기 장미와 낮고 둥글게 다듬은 라벤더가 우아하게 어우러져 여왕의 품위를 보여주는 듯하다.


◆카트린과 디안의 치열한 암투
디안은 앙리 2세보다 스무 살 연상으로 거의 어머니뻘이다. 반면 카트린은 앙리 2세와 동갑이다. 그런 디안이 어떻게 이탈리아의 유명한 메디치 가문 출신 왕비 카트린을 제치고 왕의 사랑을 독차지했을까. 슈농소성 전시실에 비치된 공식 안내문 자료에 따르면 흥미로운 얘기가 전해진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가 신성로마 황제 겸 스페인 국왕이던 카를 5세 군대에 패해 포로가 됐다가 이듬해 마드리드 조약으로 풀려나는데, 대신 볼모로 아들 프랑수아 3세와 앙리 2세를 스페인에 보내야 했다. 당시 수행단 일원이던 27살 디안은 7살이던 앙리 2세를 떠나보내며 애처로운 마음에 입을 맞췄다. 이때 앙리 2세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깊은 인상을 받았고, 스무 살 연상 여인에 기이하도록 집착하게 만들었다. 앙리 2세는 왕위에 오른 1547년 과부가 된 디안에게 발랑티누아 공작 직위를 하사하고 왕실의 보석과 슈농소성을 선물로 줬다.



나이가 많은 디안은 완벽한 외모를 유지하고 왕의 총애를 받기 위해 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목욕으로 몸을 관리하고, 셰르강의 허브로 연고와 약제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영지를 세 배로 확장하고 셰르강을 가로 지르는 5개 아치형 다리까지 건설해 현재 슈농소성 모습의 기초를 닦았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다. 부귀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는 법. 1559년 파리 마상시합에서 앙리 2세가 창 조각이 눈에 박히는 중상을 당해 사망하면서 디안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카트린은 기다렸다는 듯, 디안에게 보석과 슈농소성 반환을 명령하고 디안을 20여㎞ 떨어진 쇼몽성으로 쫓아낸다. 카트린은 당시 15살이던 장남 프랑수아 2세 등을 섭정하며 약 30년 동안 권력을 장악했다. 두 여인의 대결에서 결국 카트린이 승리한 셈이다.



◆여인의 손길로 다듬은 슈농소성
성 입구로 들어서면 르네상스 양식 마르크 탑과 마르크 가문 문장인 상상의 동물 키메라와 독수리로 장식한 우물을 만난다. 13세기부터 존재한 슈농소성은 원래 물방앗간과 수중의 퇴적토 위에 건축한 탑 4개를 지닌 마르크 가문의 단순한 장방형 요새였다. 실제 탑 주위에 해자를 만들어 경계를 삼은 옛 중세 요새 디자인이 그대로 남아 있다. 1515년 프랑수아 1세의 재정회계 감사관 토마 보이에르가 영지를 매입해 물방앗간과 중세 성곽을 허물고 화려한 르네상스 스타일의 탑과 본관을 짓기 시작했다. 성의 건축과 세부 장식을 지휘한 이가 보이에르의 아내 카트린 브리소네로 베네치아 궁전을 본떠 설계했다. 프랑스 왕들은 일정한 궁전 없이 귀족들과 루아르 고성들을 옮겨 다니며 생활했는데 1535년 프랑수아 1세가 슈농소성을 왕실 영지에 포함시켰다.



본관 1층 근위병실을 지나면 당시 삶의 중심이던 예배당이 나온다. 여왕들이 미사 때 앉던 왕실 전용석에는 연도 ‘1521’이 적혀 고성의 역사를 전한다. 근위병실 옆방은 디안의 침실. 벽난로, 천장, 가구 등을 자세히 보면 ‘H’ 옆에 ‘D’와 ‘C’를 포개 놓은 듯한 모노그램이 보인다. 각각 앙리 2세, 디안, 카트린의 이니셜이다. 원래 H와 D만 있었는데 카트린이 디안을 쫓아낸 뒤 C 위에 D를 겹쳐 썼다. 심한 모멸감을 준 디안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애쓴 흔적이다. 디안의 방이지만 벽난로 위에는 카트린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이 방의 진정한 주인은 디안이 아니라 카트린이란 뜻이다. 디안 침실 옆방은 섭정 왕비가 된 카트린이 프랑스를 다스리던 집무실로 자신이 좋아하는 녹색으로 꾸몄다. 16세기 이탈리아 진열장, 15세기 벨기에 브뤼셀 태피스트리 ‘쥐방울덩굴’과 여러 작가의 작품도 만난다.



카트린은 정권을 잡은 뒤 디안이 만든 다리 위에 3개 층 구조의 웅장한 갤러리를 얹었다. 1576년 장 뷜랑이 설계한 갤러리는 길이 60m, 너비 6m로 흑백 바둑판무늬로 바닥을 꾸몄고 밖으로 노출된 천장 대들보, 아름다운 아치형 창문 18개를 설치해 건축미를 극대화했다. 카트린은 3남 앙리 3세 대관식 축제 때 귀족들을 초대해 갤러리를 무도회장으로 사용했다. 1층에는 프랑수아 1세, 루이 14세 응접실도 있고 지하 1층에는 주방이 배치됐다. 매일 신선한 식재료를 배로 공급받을 수 있도록 강과 계단으로 연결했고 강물을 대량으로 끌어올리는 펌프도 설치했다.


2층은 대형 태피스트리가 걸린 복도를 중심으로 카트린의 두 딸과 3명의 며느리를 추억하는 다섯 왕비의 침실, 카트린의 침실로 구성됐다. 카트린의 침실은 디안 침실의 바로 위다. 카트린이 바닥에 구멍을 뚫어 디안의 동태를 훔쳐봤다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이니 디안을 향한 시기와 질투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된다.


슈농소성은 이후 여러 여인을 주인으로 맞는다. 앙리 3세가 사망한 뒤 성에서 은둔하며 독서, 자선, 기도에 전념한 왕비 루이즈 드 로렌을 거쳐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등 지식인과 교류하던 계몽주의 대표주자 루이즈 뒤팽, 성의 진입로에 플라타너스를 심은 아폴린 드 빌뇌브 백작부인, 슈농소성을 디안 시대 모습으로 복원해 사교계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며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다 파산한 마르그리트 윌슨 펠루즈를 거쳐 1913년 프랑스 초콜릿 재벌 메니에 가문이 슈농소성의 마지막 소유자가 됐다. 1차 세계대전 때 간호장교이던 시몽 메니에가 슈농소성 갤러리 2개 층을 병동으로 바꿔 2000명이 넘는 부상자를 간호하는 등 슈농소성의 주인은 늘 여인이었다. 슈농소성이 지금도 ‘여인들의 성’으로 불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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