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국 눈치 보느라 한 손 묶였어도 강력 경쟁자
얼마 전 로봇청소기를 샀다. 아내와 함께 유튜브 리뷰부터 쇼핑몰의 사용 후기, 중국제 로봇청소기의 보안 문제를 다룬 뉴스까지 꼼꼼히 살폈다. 최종적으로 고른 건 중국산 제품. 유튜버들은 가격이 절반 이하인 중국산이 국산보다 기능도 많고 고장도 적다며 칭찬했고, 사용 후기와 별점도 중국산의 압승이었다.
제조업에서 한국이 중국에 밀린 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라지만 기계가 너무 좋아서 씁쓸한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딱 10년 전만 해도 한국 제조업은 세계 최고였는데 따라잡힐 때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게 과연 로봇청소기와 제조업만의 문제일까.

지난 7월 티빙과 왓챠, 웨이브 등 이른바 ‘토종 OTT’들이 ‘번화(繁花)’라는 중국 드라마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이미 중국 드라마는 ‘가성비’가 좋아 자본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국내 OTT의 단골 수입 상품이 된 지 오래다. 한국의 중국 드라마 팬층도 꽤 두텁다. 그런데 번화는 기존의 중국 드라마와는 좀 달랐다. 우선 감독이 중년의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중경삼림’, ‘화양연화’의 왕가위. 상하이 출신으로 홍콩에서 성공했던 왕 감독이 1990년대 급성장하던 상하이를 다룬 첫 TV 드라마 연출작이었다. 번화는 1000억원 가까운 제작비를 들여 당시의 상하이 주요 거리를 세트로 다시 만드는 등 제작 단계부터 화제를 모았고, 상영 후에는 시청률 1위는 물론 드라마에 등장하는 상하이 음식과 90년대식 복장까지 중국 전역에서 인기를 끌 정도였다고 한다.
영화처럼 화려한 화면도 대단했지만 산업적으로 봐도 놀라운 점이 많다. 우선 판권을 사들인 회사가 텐센트 비디오. 스마트폰 앱 위챗으로 유명한 텐센트의 자회사로 ‘중국의 넷플릭스’에 해당하다. 텐센트와 알리바바 같은 중국의 인터넷 기업들은 약 10년 전부터 ‘베놈’, ‘원더우먼’, ‘미션임파서블’ 시리즈 등 할리우드 영화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해 왔는데 최근에는 이 노하우를 가져와 중국 영화와 드라마에 아낌없이 투자하면서 산업의 수준을 크게 높이고 있다. 또 하나 놀란 건 번화가 지불한 음악 저작권료. 오리지널 OST를 작곡한 게 아니라 1990년대 중국과 홍콩의 유행가들을 다시 사용하기 위해서만 20억원에 가까운 저작권료를 지불했다고 한다. 중국 하면 해적판 유통 등의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새 창작자에게 제대로 보상하는 산업 구조가 자리 잡은 셈이다.
내용 또한 기존의 중국 영화나 드라마와는 사뭇 달랐다. 무엇보다 기존의 중국 영화에서 꼭 보이던 국가와 인민을 위해 희생하는 영웅 서사가 모두 사라졌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영웅이 아니라 돈을 벌어 성공하려는 욕망으로 가득 찬 개인일 뿐이고,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사랑하고 슬퍼한다. 왕가위 감독이 홍콩 영화를 찍던 시절처럼 도시 속 개인에게 집중한 이런 스토리가 중국인을 사로잡았던 모양이다.
제조업도 문제인데, 문화산업도 큰일 났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중국 네티즌들이 자주 쓴다는 ‘부재의 존재’라는 표현이 있다. 예를 들어 논란의 발언을 한 사람이 갑자기 뉴스에서 사라지면 정부가 이 사람을 싫어한다는 뜻으로 여긴다. 이런 식으로 무슨 얘기를 하는지보다 어떤 얘기가 없는지에 더 신경을 쓴다. 드라마 번화 속의 상하이도 마찬가지다. 번영하는 민간기업 얘기는 나오지만, 이 때문에 폐업한 국영기업과 이로 인한 대규모 실업사태 얘기는 쏙 빠져 있다. 여전히 당국 눈치를 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 문화산업은 아직 한 손을 묶고서 링 위에 오른 선수처럼 보인다. 이들이 묶은 손을 언제 풀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손을 묶은 채로도 매우 강력한 상대가 이웃이란 건 늘 긴장되는 일이다.
김상훈 실버라이닝솔루션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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