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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의시읽는마음] 물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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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9-08 23:09:09 수정 : 2025-09-08 2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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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연

깨지지 않을 이유보다

깨질 이유가 많다

 

날아가지 않을 이유보다

날아갈 이유가 더 많듯

 

부서질 수 있어서

부서짐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게 됐다

 

가로지를 수 없는 모순이 있어

당신은 당신다워지고

나는 나다워졌다

 

차가우면 차갑게

뜨거우면 뜨겁게

 

물컵은 어떤 상태에 이르기 위해

격렬히 고요하다

(하략)

컵은 깨지지 않고 있다. 깨지지 않을 이유보다 깨질 이유가 더 많을 수도 있는데, 컵은 책상 위에 잠잠히 놓여 있다. 미지근한 보리차를 한 모금 머금은 채 늦여름의 신열을 견디고 있다.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다 말고 불현듯 낯설게 느껴지는 컵의 단단한 몸체를 조심히 쓸어 본다.

언젠가 깊이 좋아한 사람에게서 들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다는 말. 그 말을 듣자 왈칵 화가 치밀었다. 어떤 이유로, 고작 이유 따위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고 고함을 지르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다. 살아 나아가는 일보다 그 반대가 더 합당한 듯 여겨지는 때, 마음이 텅 비어 유난히 스산한 때, 그런 때가 누구에게나 있겠지. 하지만, 하지만….

언제든 깨질 수 있기 때문에 깨지는 일에 대해 함부로 하지 않는 것. 이런 태도로써 나는 나를, 당신은 당신을 지킬 수 있다면 좋겠다. 고독 속에 격렬히 고요히 자신을 견딜 수 있다면.

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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