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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기의시대정신] 덕후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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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9-08 23:09:21 수정 : 2025-09-08 2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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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휩쓴 ‘케데헌’에 덕후 폭증
한국 문화 전체로 관심사 확장
어린 세대에 각별한 기억 남아
‘영원히 깨질 수 없는’ 흐름 되길

입장료는 무료다. 하지만 퇴장료는 만만치 않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불고 있는 굿즈 열풍을 빗댄 농담이다. 지난주 오세아니아 문화 특별전 ‘마나 모아나’를 보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가 혼쭐이 났다. 주차부터 입장까지 무더위 속 인산인해를 헤치느라 진땀을 뺐다. 뮤지엄 숍의 열기는 더했다. 요즘 인기라는 ‘까치·호랑이 배지’는 이미 품절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올해 관람객 수는 8월 중순에 벌써 400만명을 넘어섰다. 이런 추세라면 2024년 기준 루브르(886만명), 바티칸(676만명), 영국박물관(582만명), 메트로폴리탄(536만명)과 어깨를 나란히 할 기세다. 놀라울 따름이다.

 

한적한 전시실을 홀로 둘러보던 나만의 호사는 사라졌다. 주범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일명 ‘케데헌’이다. 6월 공개와 동시에 글로벌 화제작으로 떠오르더니 그 파급력이 날로 거세지고 있다. 8월 초 OST로 빌보드와 영국 오피셜 차트 정상에 올랐고, 8월 23~24일 열린 싱어롱 상영은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8월 말 넷플릭스 영화 부문 1위에 오르며 쇼 부문 1위 ‘오징어 게임’을 바짝 뒤쫓더니, 급기야 9월 3일 누적 시청수 2억6600만회를 돌파하며 그 기록을 넘어섰다. 넷플릭스 역대 흥행 콘텐츠 1위를 차지한 것이다. 한때 주변부 문화로만 여겨지던 케이팝과 오컬트가 만나 이토록 거대한 힘을 발휘하다니, 문화의 흐름은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케데헌은 한국의 전통문화부터 소소한 일상까지 빼곡히 담아내며 한국 문화 전체를 덕후들의 놀이판으로 바꾸어 놓았다. 덕후들은 작품을 보고 굿즈를 사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세계관 확장이야말로 궁극의 기쁨이다. 그런 점에서 케데헌은 무궁무진한 레퍼런스의 보고다. 신스틸러로 등장한 호랑이 ‘더피’와 까치 ‘서씨’는 민화 ‘호작도’로 이어진다. 화려한 무대 장치는 조선 왕실의 ‘일월오봉도’ 그대로다. 저승사자 캐릭터를 따라 한국 전통 무속의 세계에 다다른 이들도 있다. 케데헌 세계관을 탐색하던 이들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몰려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밥과 냉면 같은 한식은 물론, 남산타워와 낙산공원, 북촌 한옥마을 등 작품 속 배경지도 ‘성지순례’ 코스가 되었다. 문화는 불이 붙는 순간, 스스로 증식한다.

 

이러한 현상은 그동안 외국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보며 늘 부러워했던 지점이다.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과 마블의 ‘토르’ 시리즈는 북유럽 신화 덕후들의 입구다. ‘죽은 자의 날’ 풍습을 통해 멕시코에 선명한 오렌지빛을 입힌 것은 픽사 애니메이션 ‘코코’였다. 나를 국립중앙박물관 ‘마나 모아나’ 전시에 이끈 것도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였다. 그곳에서 나는 수천 년 전 거대한 바다를 건넌 오세아니아인의 용기를 만났다. 덕질은 단순한 취향 소비를 넘어, 낯선 세계를 이해하는 창이 된다.

 

케데헌의 인기는 청소년 팬덤에서 출발해 성인으로 확산되었고, 서너 살 아이들에게까지 번졌다. 아이들은 같은 장면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해서 보며 몰입한다. 가장 어린 세대의 감각과 기억에 깊이 새겨진다는 점에서 케데헌 신드롬은 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빅테크 최고경영자(CEO) 중에는 덕후가 많다. 팔란티어의 피터 틸은 반지의 제왕의 열렬한 팬이다. 회사명 ‘팔란티어’는 물론, 그의 투자사와 프로젝트 명칭인 ‘미스릴’, ‘리벤델’, ‘발라’ 등에도 톨킨 세계관에 대한 경의가 가득하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는 SF 소설과 일본 애니메이션 덕후로 잘 알려져 있다. 그 몰입이 자율주행과 로봇 기술, 화성 탐사라는 꿈으로 이어졌다. 그의 소셜미디어에는 일본 애니메이션 관련 용어와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1980년대 서구 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었고, 그 시절 유년기를 보낸 머스크 같은 이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은 사무라이, 야쿠자 영화와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하다. 미국 대중문화의 정서적 고향인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도 마찬가지다. 제다이 기사단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무라이 영화에서 직접 영감을 얻었고, 영화 전체가 일본 무사도의 세계관을 차용했다. 서구 문화가 아시아를, 혹은 한국을 그릴 때 일본식 이미지로 치환하는 경향은 여전히 강하다. 그러나 ‘기생충’, ‘오징어 게임’, ‘케이팝 데몬 헌터스’ 이후는 달라질 것이다. 이들이 한 세대 뒤 어떤 문화적 원형으로 발아할지 지켜볼 일이다.

 

케데헌의 메인 테마곡 ‘골든(Golden)’에는 영어 가사 틈틈이 한국어가 섞여 있다. 특히 하이라이트에서 반복되는 ‘영원히 깨질 수 없는’ 구절이 마음에 꽂힌다. 외국인들이 그 가사를 떼창하는 순간 뭉클해진다. 어릴 땐 상상조차 못 했던 한국 문화의 전성기를 지켜보며 여러 생각이 겹친다. 험한 시절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는 경외감, 그리고 이 흐름이 ‘영원히 깨질 수 없는 것’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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