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만드는 혁신적인 능력으로 정의
기억·상상 관장하는 뇌의 한 부분 해마
회상 과정서 추측으로 틈새 채우기도
기억 통한 ‘혁신’ 동물과 차별화된 능력
“풍부한 경험·지식은 새 아이디어 토대”
기억의 미래/ 정민환/ 심심/ 2만1000원
올해 초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17’에는 생체 정보와 기억을 저장했다가 다시 복제한 뒤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기술이 등장한다. 조니 뎁 주연의 2014년 영화 ‘트렌센던스’와 미국 드라마 ‘업로드’에서도 기억과 의식을 디지털화해서 슈퍼컴퓨터나 가상 세계로 전송하는 장면이 나온다. 최근 인공지능(AI) 관련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영화 속 상상은 점점 사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챗GPT 같은 생성형 AI는 이미 사용자의 질문이나 대화를 바탕으로 말투와 성격을 모방할 수 있다. 메타, 구글 등 빅테크는 현재의 AI 수준을 뛰어넘어 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초인공지능(ASI) 개발에 들어간 상태다. 이런 식으로 인간을 대신하는 AI의 시대가 도래한다면 인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나의 기억이나 의식을 로봇이나 복제인간에 이식한다면, 그것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루타르코스가 쓴 ‘영웅전’에는 ‘테세우스의 배’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테네인들은 소 머리에 인간의 몸을 한 미노타우로스를 무찌르고 돌아온 영웅 테세우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가 타고 온 배를 보존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낡은 널빤지를 하나씩 교체하다 보면, 언젠가는 테세우스가 있었던 원래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지가 플루타르코스가 던진 질문의 요지다.
아주대 의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현재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생명과학과 뇌인지과학을 연구하는 저자는 인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기억’에서 시작한다. 그의 연구팀은 기억과 상상을 연결해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인간의 혁신적인 능력을 ‘모사-선택 이론’이라고 정의한다. 뇌의 해마가 단순히 과거 사건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를 대비해 최적의 행동 계획을 수립하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학습한다는 이론이다. 해마에는 CA1, CA3 신경망이 있는데 CA1은 효용가치 정보를 표상한 가치 평가를 담당하고, CA3은 강력한 회귀 투시를 기반으로 상상과 창의적 시뮬레이션을 담당한다.

해마가 뇌에서 기억을 관장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기억뿐 아니라 상상을 담당하는 부분도 바로 해마다. 2024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드미스 하사비스는 박사 과정 중에 상상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해마가 손상된 환자와 일반인으로 구성된 그룹을 나눠 아름다운 바닷가의 백사장에 누워있다거나 다양한 전시품이 가득 담긴 박물관에 왔다고 상상해보라고 했다. 대조군과 달리 해마가 손상된 사람들은 가상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능력이 현저히 저하된 것으로 나타났다. 기억과 상상이 일부 동일한 신경 메커니즘을 공유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해마가 기억과 상상을 모두 담당하면서 기억에 오류가 생기거나 가짜 기억을 만들어내는 일도 생겨난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왜곡되는 대표적인 예가 ‘기억의 틈새 채우기’다. 출근길에 자동차 사고가 났다고 가정해보자. 평소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던 만큼 이 사건을 여러 차례 회상하고 주변에 언급한다. 당시 사건의 모든 정보가 장기 기억으로 저장되지는 않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도 희미해진다. 상대방 차량 운전자가 입고 있던 옷과 신발의 색깔이 떠오르지 않으면 여러 번 회상하는 과정에서 상상과 추측을 통해 기억의 틈새를 채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실제 상대 운전자가 입었던 옷은 주황색이었지만, 빨간색으로 기억하게 될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 최근에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몇 차례 교통사고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그 기억이 더욱 강화되면서 빨간색 옷에 그려진 무늬와 천의 질감까지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강조한다. 기억이 과거를 저장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그려내는 게 상상인 셈이다. 인류가 다른 동물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화와 문명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기억과 상상을 통한 ‘혁신 능력’ 덕분이다. 그렇다면 AI는 인간의 혁신 능력을 대체할 수 있을까. 현재의 AI는 불가능하지만, 미래에도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혁신 능력이 AI를 포함한 우리가 누리는 문명을 이룩한 것처럼 앞으로 어떤 미래를 설계해나가는 것도 인간의 혁신 능력에 달려 있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AI가 창조적인 혁신을 이루는 훌륭한 파트너가 될 수도 있고, 우리를 완전히 대체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도 있다. 저자는 최신 뇌 과학 연구를 통해 우리의 삶에 대한 성찰을 제공한다. 기억이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혁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고민하게 된다.
“혁신이란 기존의 틀을 깨는 과정이기 때문에 어떤 경험이나 지식이 혁신의 출발점이 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안에서 사고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재료가 필요하듯, 창의성 또한 풍부한 재료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뛰어난 요리사라도 준비된 재료가 제한적이면 결과물 역시 한정될 수밖에 없다. 창의성도 마찬가지다. 풍부한 경험과 폭넓은 지식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탄생시키는 토대가 된다.”(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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