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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선, 국가·민족의 운명을 가르다

입력 : 2025-08-09 06:00:00 수정 : 2025-08-07 21:22:35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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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열강, 제멋대로 아프리카 분할
식민지로 삼고 경제 수탈·문화 파괴
냉전시대 상징 한반도 DMZ도 주목
가자지구에 우크라전·우주 경쟁까지
‘경계’ 둘러싼 이야기 흥미롭게 풀어

47개의 경계로 본 세계사/ 존 엘리지/ 이영래, 김이지 옮김/ 21세기북스/ 2만4000원

 

“국경선은 시대마다 다시 쓰이는 운명선”이라고 말하는 영국의 저널리스트가 쓴 이 책은 전 세계 47개의 국경선을 사례로 들어, 국경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문제가 되었으며, 그것이 우리 삶과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준다. 지도 위의 얇은 선 하나에 수천 년의 권력과 전쟁, 정체성과 분열의 이야기가 응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그동안 익숙하게 받아들인 국경을 낯설고도 생생하게 드러낸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국경선들은 사실 임의적 경계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단 한 번의 전쟁이나 협상의 결과로 생겨나기도 했고, 때로는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어졌다. 그러나 그 선이 불러온 결과는 언제나 가볍지 않았다. 어떤 선은 끝나지 않은 분쟁과 폭력을 낳았고, 어떤 선은 지금까지도 한 사회의 구조와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저자는 ‘경계’를 고정된 선이 아닌, 끊임없이 움직이는 힘의 경로로 보여준다. 모든 경계에는 정치적 의도와 권력의 역학이 스며 있고, 그것이 사라질 때는 언제나 새로운 세계 질서가 등장했다고 말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저자는 잘못 경계를 그은 대표적인 사례로,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 대륙의 산과 강의 위치도 모른 채 제멋대로 나누고 자른 1884년 ‘베를린 회의’를 제시한다.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가 유럽 열강들을 초청해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의 룰을 정하자고 제안한 회의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 서방 14개국이 참여했으나 아프리카 국가는 단 한 곳도 참여하지 못했다. 이 회의에서 유럽 열강은 그들은 한 번도 밟지 않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대륙을 제멋대로 잘라내 경계를 지었다. 각 민족과 언어, 문화는 무시된 채 제국의 편의에 따라 경계가 정해진 것이다. 아프리카는 이후 약 70년간 식민지 상태에 놓여, 경제적 수탈과 문화적 파괴, 정치적 불안정을 겪게 된다. 유럽 열강들이 자국의 이익에 눈이 멀어 직접 경험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미지의 대륙을 먼저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야망과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우월함을 과시하려는 허영이 초래한 비극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경계’를 말할 때 한반도를 갈라놓은 38선과 지금도 팽팽한 긴장 속에 존재하는 비무장지대(DMZ)를 빼놓을 수 없다. 책에서 비무장지대는 단순한 국경선이 아니라, 20세기 냉전의 상징이자 21세기까지 이어지는 비극의 유산으로 소개된다. “한반도의 경계는 ‘끝나지 않은 전쟁의 선’이다. 흔히 ‘38선’이라 불리는 구불구불한 군사분계선 사이에 자리한 DMZ는 ‘비무장’이라는 이름과 달리 세계에서 가장 무장된 지역이기도 하다. 1953년 정전협정은 체결됐지만, 평화협정은 끝내 성사되지 않았고, 분단은 체제의 경쟁과 무력 충돌, 선전전과 핵 위협이 교차하는 냉전의 최전선이 되었다. 처음엔 행정적 편의를 위해 그은 선이었지만, 이제는 전 세계 안보를 흔드는 가장 위험한 경계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220쪽)

존 엘리지/이영래, 김이지 옮김/21세기북스/2만4000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불확실한 경계도 분쟁의 씨앗이 됐다. 최근 하마스의 기습 공격과 이스라엘의 대대적인 보복으로 가자지구는 또다시 전쟁터가 되었다. 이 끝나지 않는 갈등의 뿌리는 1949년, 아랍 국가들이 벌인 1차 중동전쟁의 정전을 선언하면서 그어진 ‘그린 라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도 위 초록색 연필로 그은 이 선은 단순한 휴전선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마을과 마을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현실의 경계가 되었다. 시온주의 운동으로 시작된 유대인들의 국가 건설, 홀로코스트의 비극, 1948년 이스라엘 건국, 그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난민이 된 팔레스타인인의 분노와 저항이 이 경계 위에 중첩됐다. 수십 년에 걸친 점령과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 봉기), 분리 장벽과 정착촌 확장이 ‘두 국가 해법’조차 멀어지게 만들었고, 지금도 이 경계는 평화와 전쟁, 공존과 분열의 상징으로 남아 중동과 세계정세를 흔들고 있다.

이 밖에도 국경 지역인 크름반도와 돈바스를 둘러싼 지배권 다툼에서 비롯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남중국해에서의 해양 영유권 분쟁으로 고조되는 중국과 주변국 간의 갈등, 국경선이 모호한 히말라야 국경을 둘러싼 인도와 중국의 충돌 등이 종교·역사·국경이 복잡하게 얽힌 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가른 현재의 경계를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는 인공위성 시대의 ‘보이지 않는 국경들’을 다룬다. 이제는 바다와 하늘을 넘어 우주까지 확장되는 주도권 싸움이 새롭게 전개되고 있다. 한때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던 바다는 해양법의 등장과 함께 ‘배타적경제수역’이라는 개념 아래 새로운 경계로 규정됐듯이, 하늘 또한 20세기 중반 이후 항공 교통의 확장과 함께 국가별 공중 구역으로 세분화되고 있다. 저자는 “경계의 개념이 육지와 바다, 하늘 너머 우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우주는 인류가 마주할 ‘최후의 경계’로, 이미 이 새로운 공간을 차지하기 위한 각국의 기술과 자본이 맞물리는 첨예한 전선이 형성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지도 위에 끊임없이 선을 그어온 인간의 야망과 두려움, 그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전쟁과 조약, 지배와 갈등의 서사를 흥미롭게 보여주는 책이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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