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역 대령이자 정치학 박사로 전쟁사 전문가
“같은 책을 6번 읽었다는 초등학생에 감동 받아”
2024년 이어 2년 연속으로 독후감 공모전 진행
호국보훈의 달 6월이다. 오는 25일은 한민족 최대 비극인 6·25 전쟁 발발 75주년이다. 전쟁이 터진 직후인 1950년 7월24일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구하기 위해 보냈거나 보낼 군대를 지휘할 유엔군사령부가 일본 도쿄에 설치됐다. 그러니 올해는 유엔사 창설 75주년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1953년 7월27일 유엔군과 북한군, 중공군 간에 정전협정이 체결되며 포성이 멎었다. 다만 휴전 상태일 뿐 종전은 아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현재 진행형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자라나는 세대는 6·25 전쟁을 잘 모른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읽을 만한 관련 서적이 거의 없는 탓이다.
오래전부터 이 점을 안타깝게 여긴 장삼열 한미안보연구회 사무총장은 ‘6·25 전쟁사와 관련해 초등학생부터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써보자’는 결심을 했다. 1979년 육군사관학교(35기)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장 사무총장은 전쟁사 전문가다. 현역 시절은 물론 대령을 끝으로 육군을 떠난 뒤에도 줄곧 전쟁사 연구에 매진했다. 육군대학 전쟁사 교관, 육군군사연구소 한국전쟁연구과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국방사부장 등을 지낸 것은 물론 전쟁사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장 사무총장이 펴낸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전쟁 이야기’(할들육)는 그림과 사진으로 누구나 쉽게 6·25 전쟁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장점이다. 2024년 1월 출간 이후 현재까지 4쇄를 발간할 만큼 독자들의 반응이 뜨겁다. 국방부 진중문고(우수 도서)로 뽑혀 국군 장병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더 많은 국민이 찾아 읽을 수 있도록 독후감 공모전도 여는 중이다.
6·25 전쟁 75주년을 앞두고 만난 장 사무총장은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기회가 더욱 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다음은 장 사무총장과의 일문일답.
―6·25 전쟁을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이가 많은데.
“6·25 전쟁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혼란을 없애기 위해 국방부는 2004년 이 전쟁을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 토론회를 열어 국내에서는 ‘6·25 전쟁’, 영어로는 ‘The Korean War’(한국전쟁)로 통일했다. 개인적으로는 ‘6·25 한국전쟁’ 또는 ‘The Korean War in 1950’으로 부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전쟁 당시 한국의 지도자는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이 대통령의 전쟁 리더십에 관해 평가해달라.
“이 대통령처럼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분이 없다. 전쟁 기간 중 279회나 전선을 찾으며 현장 지도를 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불법 기습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이 대통령은 오후 3시 미 극동군 사령부에 탄약과 전투기 지원을 요청하도록 명령했다. 밤 10시에는 존 무초 주한 미국 대사와 만나 도움을 요청하고, 26일 새벽 3시에 일본 도쿄에 있는 더글러스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에게 전화해 ‘한국을 구하라’고 호통을 쳤다.”
서울이 적군에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이 대통령은 6월27일 경무대를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오전 11시 대구에 도착한 이 대통령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여겨 서울로 다시 올라가겠다고 실랑이를 벌인 끝에 대전으로 이동했다. ‘이 대통령이 너무 빨리 서울을 비운 것 아니냐’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 장 사무총장은 “개전 초기 정보 혼란 속에서 그룻된 보고가 이뤄진 탓”이라며 “다만 대통령이 북한군의 포로가 되거나 사살되면 한국은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피난은 필수였다”고 말했다.
―휴전에 반대했던 이 대통령은 결국 휴전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성사시켰다.
“반공 포로 석방이 이 대통령의 외교적 승부수라고 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은 북진 통일을 원했지만 미국 내 반전 분위기가 워낙 드세고 휴전 협상이 급진전되자 1953년 5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의 생존과 안전보장을 위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청했다. 미국이 반대하자 2만7389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하는 과감한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 아이젠하워는 어쩔 수 없이 월터 로버트슨 미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를 특사로 한국에 보냈다. 이 대통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경무대에서 18일간 12차례 로버트슨과 만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뿐 아니라 장기간의 경제 원조와 육·해·공군 20개 사단의 증강 약속까지 받아냈다. 가히 외교의 천재라 할 수 있다. 특사로 왔던 로버트슨은 훗날 이 대통령에 대해 ‘빈틈이 없고 책략이 풍부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책은 6·25 전쟁 당시 매슈 리지웨이 미 육군 대장의 역할에 관해 아주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맥아더나 밴 플리트 장군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리지웨이의 업적을 소개해달라.
“리지웨이 장군은 전임자인 월턴 워커 장군이 교통사고로 순직하자 미 8군사령관으로 갑자기 임명되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후퇴하고 있던 어려운 상황이었다. 리지웨이는 장병들의 패배 의식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특유의 전장 리더십을 발휘했다. 중공군이 7~8일 이상 작전 능력이 제한된다는 약점을 파악한 그는 유엔군이 지역을 양보하는 대신 막강한 화력으로 중공군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주는 작전을 수행해 성공했다. 당시 미군의 한반도 철수론까지 나온 상황에서 미군 수뇌부와 예하 군단장들을 설득해 공격 작전을 감행했다. 이러한 노력이 미군 철수론을 잠재우고 유엔군의 반격을 가능케 했다.”
6·25 전쟁 기간 국군은 여러 차례 자랑스러운 승리를 거뒀으나 뼈아픈 패전도 없지 않았다. 1951년 5월 강원 인제에서 벌어진 현리 전투가 대표적이다. 중공군의 5월 공세 당시 인제 일대에서 방어 중이던 국군 제3군단(제3, 9사단)이 중공군 2개군과 북한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고 방어에 실패한 뒤 후퇴한 철수 작전이다. 장 사무총장은 육군 장교 시절 3군단 관할 지역에서 7년간 복무한 경험이 있다. 당시 그는 통한의 패배 현장인 방태산을 걸어서 답사하고 현리 전투 전적비 등을 참배하며 깊은 상념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한국 육군의 흑역사’라고까지 불리는 현리 전투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무엇일까.
“첫째, 지휘관의 작전 수행 능력 부족과 지휘통솔 문제다. 3군단장은 7사단의 방어선이 돌파됐다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당시 국군은 고작해야 대대급 훈련밖에 받지 못한 상태로 전쟁에서 싸웠다. 현리 전투 패배 후에야 국군은 미군의 지도 아래 사단 단위로 훈련을 시행했다. 둘째, 정보 오판과 전투 의지의 문제다. 당시 유엔군은 서울 방어에 집착한 나머지 동부 지역의 중공군 집중을 등한시하다가 작전적 기습을 허용했다. 중공군의 기세에 눌린 국군 장병들은 사기가 저하돼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모든 무기를 버리고 방태산으로 후퇴했다. 셋째, 전투 준비 소홀이다. 당시 중공군에 빼앗긴 오마치 고개는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중요 지형지물)였기에 사전에 점령해 후방 안전을 확보했어야 한다. 오마치 고개가 막히자 중장비 대부분을 버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전쟁 이야기’ 출간 이후 각종 강연을 많이 할 텐데 독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한 3학년 초등학생은 책이 재미있어서 6번이나 읽었다고 해 감동을 받았다. 초등학교 강연에서 학생들이 진지하게 듣고 질문도 야무지게 잘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또 시니어 대상 강연을 가면 모두가 공감하고 전쟁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노인대학 강연에서 흥남철수작전을 이야기하며 관련된 영화 ‘국제시장’, 유행가 ‘굳세어라 금순아’, 기적의 항해를 한 선박 메러디스 빅토리호(號) 안에서 탄생한 5명의 아이(일명 ‘김치’ 1∼5) 이야기를 하니 모두 공감하며 노래를 함께 불렀다. 눈시울을 적시는 분도 계셨다.”
―국군이 12·3 비상계엄 사태로 인한 시련을 극복하고 다시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병들 사기가 많이 떨어졌다. 국군을 일방적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군은 명예와 사기를 먹고 산다. 이번 일을 계기로 군은 기강을 쇄신하고 거듭나야 한다. 군은 대한민국 안보를 책임지고 있기에 기본적 업무에 충실한 것이 매우 중요하다. 주요 지휘관은 유사시 어떻게 부대를 지휘하고 임무를 완수할 것인지 평소에 전쟁사의 교훈과 전략·전술을 연구함으로써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위기관리 차원의 고급장교 교육이 강화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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