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형 돌봐준 아우
빈센트 형제 죽음 뒤
예술적 유산 떠안은
동생 테오의 부인 요
Mrs. 반 고흐 메이커
숨겨진 삶·헌신 담아
빈센트를 위해/ 한스 라위턴/ 박찬원 옮김/ 아트북스/ 4만2000원
프랑스 파리에서 차로 삼사십 분 거리인 소도시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작은 공동묘지.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 테오는 형 빈센트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6개월 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형제가 소박한 묘비 아래 묻혀 있는 이곳에선 홀로 묵묵히 묘비를 바라보다 눈물을 떨구는 한국인 방문객이 유독 많다고 한다. 불우하게 생을 마친 천재와 그를 평생 진심으로 돌봐준 아우의 삶이 유독 우리나라 사람에게 각별한 감흥을 자아내기 때문일 것이다.

반 고흐는 생전에 단 한 작품, ‘붉은 포도밭’을 후원자에게 판매했을 뿐이다. 그가 37세로 세상을 떠날 당시 남긴 900여 점의 그림과 1100여 점의 드로잉, 방대한 서신은 누가 세상에 빛을 보게 했을까. 바로 테오의 부인인 요 반 고흐 봉어르다. 책은 지금껏 그늘에 가려졌던 요의 다층적인 삶을 네덜란드 빈센트 반고흐미술관 수석연구원이 10여년에 걸친 철저한 연구를 통해 밝힌 신간이다.

암스테르담 중산층 가정에서 문학과 음악을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요는 20대 중반 테오와 결혼해 프랑스에서 행복한 신혼을 맞는다. 하지만 빈센트의 죽음 직후 남편 테오마저 세상을 떠난다. 그녀는 2년도 채 되지 않은 결혼생활 끝에 갓난아기 빈센트와 반 고흐 형제가 남긴 방대한 예술적 유산의 책임을 떠안게 된다.
요는 새로운 출발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평생을 ‘두 명의 빈센트’에게 헌신한다. 테오 사망 후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뷔쉼에 하숙집을 차린 요는 숙박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전시 기획·작품 홍보·서신 필사와 번역 등 다양한 활동으로 반 고흐 알리기에 전념한다. 특히 요가 직접 기획한 1905년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전시회는 반 고흐에 대한 폭발적 반응을 끌어냈다. 이후 반 고흐의 인지도는 급상승했고, 전시 요청과 작품 구매 문의가 쇄도했다. 당시 요의 하숙집을 방문했던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집 안 곳곳이 반 고흐의 그림으로 가득 찼다. 침실 벽조차 빈 곳을 찾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 책은 요가 단지 반 고흐 형제의 예술적 유산을 지키고 알린 기획자나 딜러, 출판인으로만 머물지 않았음을 밝혀낸다. 저자는 요의 일기·서신·회계장부 등 세밀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그녀의 삶을 재구성한다. 그녀가 작품을 얼마나 체계적이고 헌신적으로 관리하고 홍보했는지 면밀히 추적한다.
요는 반 고흐 형제의 서신을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로 하나하나 읽고 필사하고 번역하는 작업을 파킨슨병으로 펜을 쥘 수 없게 된 말년까지 이어갔다. 1914년 네덜란드에서 출간된 서간집은 반 고흐의 삶과 예술을 대중이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후대 연구자들과 미술사가들은 요의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반 고흐 신화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 평가한다. 그녀는 테오가 살아 있을 때 미처 완성하지 못한 예술적 유산 관리와 작품 보급이라는 중대한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반 고흐 작품이 현대 미술사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결정적 토대를 마련했다.
가장 궁금한 대목은 요가 동생에게 후원받는 무명의 화가 ‘아주버님’을 처음 만난 순간이다. 요는 두 형제의 예술혼에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다. 테오와 결혼하면 빈센트도 자신의 인생에 들어온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결혼 전 테오에게 보낸 요의 편지엔 “우리가 결혼하면 내가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될까요. 그가 나를 성가신 존재로 볼까 봐 두렵습니다…. 그에게 편지를 써서 당신의 조그만 아내는 거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니 모든 게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을 거라 전해 주세요”라고 적혀 있다.
요양원에서 파리로 나온 후에야 빈센트를 처음 만난 요는 동생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아픈 사람을 예상했다. 그런데 내 앞에는 건장하고 넓은 어깨에 혈색 좋은 사람이 서 있었다. 유쾌한 표정에 뭔가 아주 단호함이 풍기는 외모였다…. 테오가 그를 침실로, 그의 이름을 물려받은 우리 아기의 요람으로 안내했다. 두 형제는 평온하게 잠든 아이를 말없이 바라보았고, 둘 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빈센트가 웃으며 나를 돌아보더니 요람 속 소박한 뜨개 이불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이를 너무 떠받들어 키우지 마세요, 제수씨’”
요는 여성운동에 참여하며, 정의롭고 독립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활동한 진보적인 여성이기도 했다. 방대한 반 고흐 작품 판매자로서 요는 빈센트의 미술 알리기만큼이나 ‘예술이 대중을 고양한다’는 신념에 투철했다. 그래서 미술관을 상대로는 가격을 낮추기도 했다. 핵심 컬렉션은 가족 소장을 결정하고 절대 판매하지 않았다. 예술가들의 조력자를 넘어 사회변화를 꿈꾼 사상가이자 행동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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