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의견 개진 통해 정책 완성 높여야
“긴급 사안이 발생했을 경우 한곳에 모여 의논하라.”
세종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관련 인사들이 경복궁 사정전에 직접 모여 격론을 벌이도록 했다. 황희와 허조 같은 재상은 물론, 집현전 학사와 각 부처의 실무자들까지 한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댔다.

세종에 따르면 ‘여러 부처 실무자들이 서류를 들고 이곳저곳을 오가느라 나랏일이 더디게 이뤄지고’ 있었다. 따라서 “앞으로는 국정 사안으로서 왕명이 있을 경우, 의정부와 육조 당상들이 한곳에 모여 가부를 상의한 후 결정하여, 신속히 보고하라”고 지시했다(세종실록 3년 8월5일).
서류를 들고 돌아다니느라 일이 지체된다는 대목에서 대한민국 공무원들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아무리 화상회의 기술이 발달해도, 세종청사에 있는 공무원과 대덕 단지의 연구자, 서울에 머무는 정책 결정자가 “한자리에 모여 격론을 벌이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철학자 이종관은 ‘공간의 현상학, 그리고 건축’에서 이렇게 말한다. ‘막연한 기술 낙관주의에 기대어 기획된 미래도시는 인간의 거주성과 풍경, 건축을 지워버린다.’ 스마트워크센터와 원격 회의실이 아무리 정교해도, 타인의 ‘살아 있는 몸’을 감각하지 못한 채 구성되는 공동체는 허상일 수 있다. 독일 철학자 후설 역시 ‘사물과 공간’에서 ‘살아 있는 몸’(Leib)과 ‘객관적인 몸’(Korper)을 구분한다. 화상회의에서는 외형, 즉 객관적인 몸만 보일 뿐, 감정과 직관이 깃든 ‘살아 있는 몸’은 공유되지 않는다. 타인을 단지 보는 것과, 같은 공간에서 함께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르다. 서울의 정책결정자와 세종시의 공무원이 시공간적으로 단절된 환경에서 화상회의를 할 경우, 타인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함께 있음’(Mitsein)으로 느끼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숙주 숙직사건이 단순한 미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새벽까지 집현전에서 연구하던 신숙주에게, 바로 옆의 사정전에서 일하던 세종이 자신의 용포를 벗어 덮어주었다는 일화는, 인재와 군주가 같은 공간에서 시간과 감각을 공유했기에 가능했던 장면이다.
경복궁 사정전은 단순한 집무실이 아니었다.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열띤 토론이 오가는 열린 학습공간이었다. 그 곁의 집현전은 그 아이디어를 검토하고 실행할 조건을 다듬는 작업장이었고, 그 뒤의 경회루는 최고의 세미나식 어전회의(경연) 장소였다. 집현전 서쪽 장서궐이라는 도서관 주변으로는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승지들의 승정원, 외교문서를 짓는 예문관, 실록 편찬 등 역사기록을 담당하는 춘추관이 있었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의 고위 관료들 역시 언제든지 사정전으로 달려올 수 있었다. 이 물리적 밀집은 그야말로 정책 실행력을 뒷받침하는 공간 인프라였다.
“한곳에 모여 의논하라”는 세종의 말에는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라, 소통의 방식에 대한 통찰도 담겨 있다. 세종은 회의 때마다 겉말을 넘어 속말까지 꺼내라고 독려했다. 즉위 초 “나는 인물을 잘 모른다”고 고백하며, “변변치 못한 내가 왕이 되어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 나라에 도움이 되는 말이라면 주저 말고 하라”고 부탁했다. 그는 어전회의를 일방적 보고가 아닌 세미나처럼 운영했다. 무릎 꿇거나 머리 숙이지 말고, 곧은 자세로 자유롭게 말하라 했다. 그래도 토론이 막히면 “서로 논박하고, 각자 마음속 깊이 쌓인 생각을 꺼내어 말하라”고 당부했다.
이러한 회의 문화는 동시대 중국과는 사뭇 달랐다. 1419년 명나라를 다녀온 김점은 “영락제는 모든 정사를 친람하며, 조금의 착오에도 6부 장관을 파면시키고, 모자를 벗긴 채 끌어냈다”고 전했다. 영락제 사후 명나라의 급격한 국력 쇠퇴는 인재에 대한 불신과 무관하지 않다. 인재들이 온전히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 모든 공약은 결국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세종시를 진정한 행정수도로 만들겠다는 약속 또한, 사람과 공간을 연결하는 구체적 설계 없이 실현될 수 없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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