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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 올라가 있는 줄 알았어요”…지상에서 고공농성 돕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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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5-24 06:51:37 수정 : 2025-05-24 06: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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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옵티칼 등 3개 사업장 조합원 인터뷰
박정혜, 여성 최초 고공농성 500일 돌파
“이렇게 오래갈 줄 몰라서”…쌓이는 걱정
4년차 간호사, 병원 나와 농성장 지킨 이유

“하루만 올라가 있는 줄 알았어요. ‘내일은 우리가 올라갈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어요.”

 

정나영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조합원은 지난해 1월8일 아침을 이렇게 기억했다. “급한 일이 있다”는 지회장 연락을 받고 경북 구미공장으로 달려갔다. 정 조합원이 도착했을 땐 박정혜 수석부지회장이 공장 위로 이미 올라간 뒤였다. 정 조합원은 그 뒤로 박정혜가 500일이 다 되도록 내려오지 않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세종호텔의 해고 노동자인 고진수 세종호텔지부 지부장이 고공농성에 돌입한 지 100일째인 23일 서울 중구 명동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정혜가 고공에 오른 지 500일(5월21일)을 일주일여 앞둔 12일 정 조합원은 “사태가 해결돼 500일을 채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 조합원을 포함한 지회 조합원 6명은 지상에서 투쟁을 이어가면서 음식 등 고공농성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한다. 저녁때 요구르트, 삶은 계란 등 다음 날 조식용 음식도 같이 올려보낸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내 ‘반찬 연대’가 꾸려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월, 화, 수요일에는 반찬 연대의 도움으로 식사 지원을 해결한다.

 

고공농성 초기였던 지난해 초만 해도 삼시 세끼를 올려보내곤 했다. 농성 장기화로 박정혜의 소화력이 떨어져 끼니 수가 줄었다.

 

정 조합원은 박정혜의 ‘먹고 싶은 음식’ 자체가 줄었다는 점을 애석하게 여겼다. 항상 “뭐가 먹고 싶냐”고 공장 아래에서 육성으로, 통화로 묻는 게 정 조합원 일이다. 정 조합원은 “입맛도 없어지고, 소화도 점점 안 되니까 먹고 싶은 의지가 줄어드는 것 같다”고 했다.

 

23일 서울 중구 명동 세종호텔 앞에서 민주노총 서비스연맹이 기자회견을 열고 세종호텔 해고자 복직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로 고진수 세종호텔지부 지부장은 고공농성 100일을 맞았다. 연합뉴스

박정혜는 여성노동자로서 최장기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지상 조합원들은 고공농성 중인 다른 두 곳(세종호텔지부·거제통영고 성조선하청지회)과 달리 도르래에 여성용품을 담아 올린다. 이은희 조합원은 농성 초반만 해도 피임약 복용으로 박정혜의 무월경을 유도했다고 말했다. 이 조합원도 정 조합원처럼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기간이 길어지자 몸에 너무 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조합원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박 수석이 이제 약은 안 먹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 조합원은 미혼인 박정혜가 나중에 아이를 가지려 할 때 지금 농성이 좋지 않은 영향으로 이어질까 걱정이라고 했다.

 

고공농성 500일을 앞두고 이 조합원과 정 조합원은 “죽을 만큼 힘들다”고 했다. 우선 기간이 길어져 힘들다. 곁을 지키던 동지들이 생업을 이유로 떠나갈 땐 큰 슬픔에 잠겼다. 박정혜를 포함해 11명이 투쟁에 들어갔다. 지금은 7명이다. 지난해 가을 조합원 4명이 동시에 나갔다. 이 조합원은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고 했고, 정 조합원은 “남은 동지들이 나눠서 져야 하는 부담이 더 커졌다”고 했다. 두 사람 씁쓸하고도 슬픈 표정을 지었다.

 

조합원들은 그 뒤로도 크고 작은 부침을 견뎌내야 했다. 이 조합원은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은 지나 보냈다”고 했지만, 정 조합원은 “아이 양육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점점 더 커진다”고 했다. 12세 자녀를 둔 정 조합원은 ‘엄마 언제 들어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족을 향한 미안함이 쌓인다.

 

이들은 이제 고된 고공과 지상의 일상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다. 정치권이 나서야 한다고 믿는다. 대선을 앞둔 지금이 기회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조합원은 “고공농성을 하는 와중에 대통령이 바뀔 줄은 몰랐는데, 이번이 동지를 고공에서 내릴 기회라고 생각한다”며 “정치권을 포함해 온 사회에 상황을 알리고, 해결책을 구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정치권이 손 내밀길 바라는 건 세종호텔지부와 거통고조선하청지회 조합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고진수 세종호텔지부장은 올해 2월13일부터, 김형수 거통고조선하청지회장은 3월15일부터 고공농성 중이다.

 

김 지회장이 오른 서울 중구 한화빌딩 앞 철탑 아래 상주하는 박수정 조합원은 지난해 12월까지만 해도 4년 차 간호사였다. 비상계엄과 탄핵국면에 광화문 광장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는 거통고조선하청지회를 만난 뒤 생업을 멈췄다. 지회 가입도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 박 조합원은 “거통고 일은 광장에서야 알게 됐다”며 “늦게 알게 돼 미안했다. 알게 된 이상 남 일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굴뚝신문 1면. 굴뚝신문 발행위원회 제공

박 조합원은 지상에서 시민들의 응원과 조롱의 목소리를 모두 듣는다고 했다. 그는 “잘 모르시는 분들은 김 지회장이 저녁에 내려와서 아침에 다시 올라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은 하청노동자 5명을 상대로 470억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3년째 이어오고 있다. 지회는 노조법 2·3조의 허점 때문이라고 본다. 박 조합원이 투쟁에 합류하게 된 이유도 이 사안이 모두의 일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고, ‘손배폭탄’을 제한하는 내용의 노조법 개정을 끌어내야 한다고 본다.

 

박 조합원은 사회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당하게 파업을 했을 때 기업이 허무맹랑한 금액을 손배 청구하지 않게끔 법이 꼭 개정되면 좋겠다”며 “농성장까지 오지 않더라도 많은 분이 눈여겨 봐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고 지부장과 함께 복직을 요구하는 이청우 세종호텔 공대위 집행위원장도 마찬가지 심정을 밝혔다. 23일은 고 지부장이 고공에 오른 지 100일째 되는 날이다. 그런데도 고 지부장과 투쟁의 시간을 함께 이어가는 이 위원장의 목소리는 밝다. 이 위원장은 “사무장 동지는 무릎에 물이 차기도 하고 힘들지 않다고 할 순 없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을 내려 한다”고 했다.

 

이 위원장의 걱정은 정치권의 무관심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전에는 농성장을 찾아오기도 했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고공농성을 이제 언급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우려가 커졌다.

 

이 위원장은 “민주당은 이미 집권 여당인 것처럼 한다. 이전보다 더 보수화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며 “지치지 않고, 대선 기간에 후보들이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고 계속 요구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고공 농성장 3곳의 목소리는 시민의 삶과 연결된 비정규직 문제, 고용 문제, 노조할 권리문제”라며 “정치인들이 진짜 정치를 하려고 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노동자 박정혜 수석부지회장의 고공농성 500일,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고진수 지부장의 고공농성 98일, 원청 한화오션을 상대로 한 김형수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지회장의 고공농성 68일을 맞아 21일 발행된 ‘굴뚝신문’에 게재됐습니다. ‘굴뚝신문’은 현직 언론사 기자 14명과 사진작가, 교수, 노동운동가의 재능연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이지민 기자 aaaa3469@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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