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혜, 여성 최초 고공농성 500일 돌파
“이렇게 오래갈 줄 몰라서”…쌓이는 걱정
4년차 간호사, 병원 나와 농성장 지킨 이유
“하루만 올라가 있는 줄 알았어요. ‘내일은 우리가 올라갈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어요.”
정나영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조합원은 지난해 1월8일 아침을 이렇게 기억했다. “급한 일이 있다”는 지회장 연락을 받고 경북 구미공장으로 달려갔다. 정 조합원이 도착했을 땐 박정혜 수석부지회장이 공장 위로 이미 올라간 뒤였다. 정 조합원은 그 뒤로 박정혜가 500일이 다 되도록 내려오지 않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박정혜가 고공에 오른 지 500일(5월21일)을 일주일여 앞둔 12일 정 조합원은 “사태가 해결돼 500일을 채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 조합원을 포함한 지회 조합원 6명은 지상에서 투쟁을 이어가면서 음식 등 고공농성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한다. 저녁때 요구르트, 삶은 계란 등 다음 날 조식용 음식도 같이 올려보낸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내 ‘반찬 연대’가 꾸려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월, 화, 수요일에는 반찬 연대의 도움으로 식사 지원을 해결한다.
고공농성 초기였던 지난해 초만 해도 삼시 세끼를 올려보내곤 했다. 농성 장기화로 박정혜의 소화력이 떨어져 끼니 수가 줄었다.
정 조합원은 박정혜의 ‘먹고 싶은 음식’ 자체가 줄었다는 점을 애석하게 여겼다. 항상 “뭐가 먹고 싶냐”고 공장 아래에서 육성으로, 통화로 묻는 게 정 조합원 일이다. 정 조합원은 “입맛도 없어지고, 소화도 점점 안 되니까 먹고 싶은 의지가 줄어드는 것 같다”고 했다.

박정혜는 여성노동자로서 최장기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지상 조합원들은 고공농성 중인 다른 두 곳(세종호텔지부·거제통영고 성조선하청지회)과 달리 도르래에 여성용품을 담아 올린다. 이은희 조합원은 농성 초반만 해도 피임약 복용으로 박정혜의 무월경을 유도했다고 말했다. 이 조합원도 정 조합원처럼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기간이 길어지자 몸에 너무 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조합원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박 수석이 이제 약은 안 먹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 조합원은 미혼인 박정혜가 나중에 아이를 가지려 할 때 지금 농성이 좋지 않은 영향으로 이어질까 걱정이라고 했다.
고공농성 500일을 앞두고 이 조합원과 정 조합원은 “죽을 만큼 힘들다”고 했다. 우선 기간이 길어져 힘들다. 곁을 지키던 동지들이 생업을 이유로 떠나갈 땐 큰 슬픔에 잠겼다. 박정혜를 포함해 11명이 투쟁에 들어갔다. 지금은 7명이다. 지난해 가을 조합원 4명이 동시에 나갔다. 이 조합원은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고 했고, 정 조합원은 “남은 동지들이 나눠서 져야 하는 부담이 더 커졌다”고 했다. 두 사람 씁쓸하고도 슬픈 표정을 지었다.
조합원들은 그 뒤로도 크고 작은 부침을 견뎌내야 했다. 이 조합원은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은 지나 보냈다”고 했지만, 정 조합원은 “아이 양육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점점 더 커진다”고 했다. 12세 자녀를 둔 정 조합원은 ‘엄마 언제 들어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족을 향한 미안함이 쌓인다.
이들은 이제 고된 고공과 지상의 일상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다. 정치권이 나서야 한다고 믿는다. 대선을 앞둔 지금이 기회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조합원은 “고공농성을 하는 와중에 대통령이 바뀔 줄은 몰랐는데, 이번이 동지를 고공에서 내릴 기회라고 생각한다”며 “정치권을 포함해 온 사회에 상황을 알리고, 해결책을 구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정치권이 손 내밀길 바라는 건 세종호텔지부와 거통고조선하청지회 조합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고진수 세종호텔지부장은 올해 2월13일부터, 김형수 거통고조선하청지회장은 3월15일부터 고공농성 중이다.
김 지회장이 오른 서울 중구 한화빌딩 앞 철탑 아래 상주하는 박수정 조합원은 지난해 12월까지만 해도 4년 차 간호사였다. 비상계엄과 탄핵국면에 광화문 광장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는 거통고조선하청지회를 만난 뒤 생업을 멈췄다. 지회 가입도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 박 조합원은 “거통고 일은 광장에서야 알게 됐다”며 “늦게 알게 돼 미안했다. 알게 된 이상 남 일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박 조합원은 지상에서 시민들의 응원과 조롱의 목소리를 모두 듣는다고 했다. 그는 “잘 모르시는 분들은 김 지회장이 저녁에 내려와서 아침에 다시 올라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은 하청노동자 5명을 상대로 470억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3년째 이어오고 있다. 지회는 노조법 2·3조의 허점 때문이라고 본다. 박 조합원이 투쟁에 합류하게 된 이유도 이 사안이 모두의 일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고, ‘손배폭탄’을 제한하는 내용의 노조법 개정을 끌어내야 한다고 본다.
박 조합원은 사회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당하게 파업을 했을 때 기업이 허무맹랑한 금액을 손배 청구하지 않게끔 법이 꼭 개정되면 좋겠다”며 “농성장까지 오지 않더라도 많은 분이 눈여겨 봐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고 지부장과 함께 복직을 요구하는 이청우 세종호텔 공대위 집행위원장도 마찬가지 심정을 밝혔다. 23일은 고 지부장이 고공에 오른 지 100일째 되는 날이다. 그런데도 고 지부장과 투쟁의 시간을 함께 이어가는 이 위원장의 목소리는 밝다. 이 위원장은 “사무장 동지는 무릎에 물이 차기도 하고 힘들지 않다고 할 순 없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을 내려 한다”고 했다.
이 위원장의 걱정은 정치권의 무관심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전에는 농성장을 찾아오기도 했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고공농성을 이제 언급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우려가 커졌다.
이 위원장은 “민주당은 이미 집권 여당인 것처럼 한다. 이전보다 더 보수화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며 “지치지 않고, 대선 기간에 후보들이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고 계속 요구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고공 농성장 3곳의 목소리는 시민의 삶과 연결된 비정규직 문제, 고용 문제, 노조할 권리문제”라며 “정치인들이 진짜 정치를 하려고 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노동자 박정혜 수석부지회장의 고공농성 500일,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고진수 지부장의 고공농성 98일, 원청 한화오션을 상대로 한 김형수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지회장의 고공농성 68일을 맞아 21일 발행된 ‘굴뚝신문’에 게재됐습니다. ‘굴뚝신문’은 현직 언론사 기자 14명과 사진작가, 교수, 노동운동가의 재능연대로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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