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여권 대체 신분증 인정되기에
제시했지만 공항 직원은 불친절
배타적 시선의 본질 여전해 씁쓸
지난주 조금 이른 여름 휴가를 다녀왔다.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까지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가서 렌터카로 플로리다주 펜서콜라까지 이동한 뒤 다시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에 복귀하는 일정이었다. 마지막 여행지였던 펜서콜라는 미국 남부의 멕시코만(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표기에 따르면 아메리카만)에 인접한 해변 소도시다. 같은 플로리다주의 마이애미처럼 붐비는 유명 관광지는 아니지만 아름다운 해변으로 알려진 데다 이미 휴가철이 시작돼서 그런지 돌아오는 날 펜서콜라공항에는 수속을 위한 줄이 길었다. 그런 중 아시아인의 비중은 현저히 작았다.
줄을 꽤 길게 선 다음 차례가 돌아와 한국 여권을 내밀었더니 백인 남성 검사관이 퉁명스럽게 넌 ‘리얼아이디(Real ID)’가 없냐고 물었다. 9·11 테러를 기점으로 주정부 발급 신분증에 연방 정부가 정한 보안 기준을 적용한 것이 리얼아이디인데 미 당국은 5월 7일부터 미국 전역에서 국내선 여행에도 리얼아이디가 필요하도록 보안 기준을 강화했다. 특파원 부임 후 임기 동안 매년 갱신해야 하는 1년짜리 주정부 발행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았지만 여행에는 여권을 사용하는 게 습관이 됐고, 올해 ‘헨리여권지수’ 기준 여권 파워 세계 3위라는 한국 여권에 대한 믿음도 은연중 있었던 것 같다. 출발할 때 워싱턴 로널드레이건공항에선 여권으로 수속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부랴부랴 운전면허증을 꺼내 바코드를 읽혔는데 뭐가 잘못된 모양이다. 리얼아이디 문제로 이미 나를 한 번 의심한 검사관이 이번엔 다짜고짜 “보딩패스(항공권)와 신분증 정보가 다르니 항공사 데스크에서 보딩패스를 점검한 뒤 다시 줄을 서라”고 했다. 무슨 정보가 다른 건지 말해달라고 하자 그는 힐끗 항공권을 보더니 “우리 공항에선 홍콩을 가지 않는다”고 툭 던졌다. 항공권에 도착지는 분명히 경유지인 ‘내슈빌’이 적혀 있었던 데다 신분증에 도착지 정보가 쓰여 있을 리도 만무하다. 검사관은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무시한 채 다음 사람을 호출했다.
항공사 데스크에서 확인한 결과 시스템에 생일 정보가 잘못돼 있었다.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해주면 될 것인데, 홍콩은 대체 무슨 말이었나 다시 항공권을 뚫어지게 보다 보니 이름의 ‘홍’(Hong)이 눈에 들어왔다. 리얼아이디를 바로 내놓지 않은 아시아인의 항공권에 적힌 ‘Hong’이 그의 머릿속에선 자동으로 홍콩(중국)으로 연상됐던 것이다. 긴 줄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서야 했다. 검사관을 다시 만나면 ‘나는 홍콩에 가지 않는다’고 쏘아붙이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교대했는지 사라져 있었다.
9·11 테러 이후 안보 강화 목적으로 만들어진 리얼아이디 제도는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이미 불법이민자 단속 용도로 쓰인 전례가 있다. 주재지법은 따르는 게 맞지만 미국 교통안전청(TSA) 홈페이지에 따르면 한국 등 외국 정부가 발행한 여권은 리얼아이디를 대체하는 적법한 신분증으로 인정된다. 로널드레이건공항에서 여권으로 탑승 수속을 하는 데 문제가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사실이 공항에 따라, 혹은 검사관에 따라 제대로 공유되지 않은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무례를 넘어 외국인에 대한 심각한 차별을 야기할 수 있는 문제다. 운전면허증 등 미국 내 신분증을 발급받지 않은 외국인 여행자들이 미국 내에서 이런 불편을 겪어야 한다면 미국 여행은 매우 피곤한 일이 될 것이다. 이미 미국 여행객이 올해 9.4% 감소할 것이라는 여행분석업체의 조사 결과가 있다.
여행을 하면서 친절한 남부 미국인을 많이 만났기 때문에 이 사례로 미 남부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다만 외국인으로서 불편한 기류가 미국 곳곳에서 형성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번 휴가는 어릴 때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을 읽은 뒤 그 배경인 미 남부를 가 보고 싶었던 오랜 소망으로 계획했다. 당시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획기적 작품이었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도망노예 짐은 가는 곳마다 신분 검사 때문에 노심초사한다. 2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미국에선 대상이 흑인노예에서 이민자로 옮겨졌을 뿐 배타적인 시선의 본질은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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