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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혐오·불신… 여성들의 ‘일상의 공포’ 들추다

입력 : 2025-05-13 22:00:00 수정 : 2025-05-13 22: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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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호수와 암실’ 낸 작가 박민정

교보문고 브랜드 ‘공포 소설 시리즈’
두 나르시시스트의 입체적 갈등 그려
SNS 비밀계정 등 현실 소재 몰입감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목소리 통해
독자들에게 의심의 여지 남기고파”

공동기획에 참여한 박인성 평론가
“도파민 좇는 시대의 유해함 성찰”

한 대학 인문대 연구실 소속 고전학자 ‘연화’에겐 어린이 모델 시절 자신을 희롱한 촬영 스태프를 차로 치어 죽인 남모르는 과거가 있다. 사건 후 입소한 소년원 여학교에선 예쁘고 취약한 여자아이들에게 접근해 성매매를 알선하다 수감된 ‘로사’를 만났다. 그는 연화에게 최초로 혐오의 감정을 각인시킨 인물이다.

 

여학교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지려 애쓰며 20여년을 산 연화에게 어느 날 로사의 존재감이 엄습한다. 연화가 귀애하는 동시에 통제하려 드는 왕년의 인기 모델 ‘재이’를 통해서다. 17세 나이에 세미누드 화보를 찍어야 했던 재이는 그날 촬영장에서 포토그래퍼 ‘턱수염’에게 받은 모욕을 똑똑히 기억하지만, 이를 폭로하고 고발하는 데는 주저한다. 과거를 묻으려는 재이를 대신해 복수를 결심한 연화는 인터넷에 떠도는 턱수염의 흔적을 추적해나간다.

출판사 ‘북다’ 앙스트(ANGST) 시리즈 첫 작품인 장편소설 ‘호수와 암실’을 발표한 소설가 박민정이 9일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재문 기자

소설가 박민정(40)은 한국 사회에 벌어지는 온갖 혐오와 폭력을 성실하고 치열하게 좇아온 작가다. 2009년 등단 이래 단편소설에 비중을 두고 여성혐오와 가부장제, 그에서 비롯된 다종다기한 폭력을 형상화해온 그가 최근 세 번째 장편소설 ‘호수와 암실’을 발표했다.

 

책은 교보문고 출판 브랜드 ‘북다’가 출범한 공포소설 시리즈 ‘앙스트’(ANGST)의 첫 타자로 출간됐다. 북다에 따르면 시리즈는 독일어로 ‘불안한, 걱정스러운, 무서운’을 뜻하는 앙스트를 제목으로 걸고 현대인이 일상 속에서 체감하는 공포를 기반으로 한 장편소설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박민정 작가, 앙스트 시리즈를 공동 기획한 박인성 문학평론가(부산가톨릭대 교수)를 지난 9일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시리즈에 참여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박 작가는 “기획 제안을 받고 앙스트라는 단어를 알게 된 후 지금까지 써온 내 작품들이 이 개념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다”며 “불안과 공포라는 요소를 살려서 써볼 수 있겠다 싶었다”고 답했다.

박인성 문학평론가

박 평론가는 “호러 장르는 한국 문학에서 대단히 과소평가되어 있지만 대중적 인기가 있을 뿐 아니라 보편적 장점이 있는 장르”라며 “호러를 통해 여성들이 지금 현실에서 느끼는 다양한 형태의 공포의 근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획”이라고 설명했다.

 

‘호수와 암실’은 표면적으로 장르의 관습을 따르는 공포소설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 여성의 삶을 구성하는 포괄적 현실을 집요한 의심 속에서 살펴보는 과정에서 돌연 공포물의 정서가 비져나온다. 여기에 유튜브 라이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비밀계정, 온라인을 통한 비방과 ‘멸망전’ 등 동시대 매체 환경에서 실제 벌어지는 음습한 소재들이 소설적 상황으로 소환되며 몰입감을 선사한다. 깊은 밤, ‘연화’가 탐정처럼 ‘턱수염’이 온라인에 남긴 흔적을 뒤져 단서들이 얽혀 나오듯, 독자도 활자 속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서스펜스를 느끼며 책장을 넘기게 된다.

 

소설에서 특히 흥미로운 관계는 서로 짝패를 이루는 두 나르시시스트, ‘연화’와 ‘로사’다. 로사가 과시하고 발산하는 나르시시스트라면, 연화는 가면을 쓰고 조용히 암약하는 나르시시스트다.

소설은 일인칭 화자 연화를 통해 전개된다. 그러나 연화는 독자가 공감하거나 동일시하게 되는 주인공은 아니다. 그만큼 분열적인 인물이며, 뒤틀린 내면의 소유자다. 박 작가는 “연화가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인지 독자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며 “신뢰할 수 없는 화자는 연화이기도 하지만 작가인 나 자신이기도 하다”고 했다.

 

“단 한 명의 독자에게라도 의심의 여지를 드리고 싶어요. 이전까지는 책을 낼 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무조건 지지받고 싶은 마음이었지요. 제 책의 리뷰를 많이 찾아보는 편인데, 상처가 되는 말들을 보며 예전엔 ‘내가 왜 이런 부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게 부당한 평가가 아니라 의심을 하는 거고, 오히려 제가 질문을 많이 드린 작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어느 순간부터 합니다.”

 

책에서 작가는 섣불리 ‘여성 연대’의 가능성을 말하지도 않는다. 남성뿐 아니라 여성 간 사적 관계에서도 애정과 배신, 학대와 불신이 공존하며 복잡한 국면이 이어진다. 박 평론가가 해설에서 명확히 짚어내듯, 이 책은 “단순히 ‘여적여’(여성의 적은 여성) 서사에 대한 대항서사로서 ‘여돕여’(여성을 돕는 여성) 서사를 구축하는 단순한 논리를 따르는 소설은 아니”다. 평탄화된 여성성 재현에 머무르기보다 입체적인 방식의 갈등을 그려내기에 정교한 독해가 필요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가해자 대 피해자의 대결, 남성 대 여성의 대결 같이 손쉬운 갈등 극복의 이야기를 만들지 않고, 가장 어려운 길에 스스로 접어드는 이야기가 ‘호수와 암실’에 담겼다고 생각해요. 한시도 우리를 그냥 놔두지 않는 유해함의 덩어리이면서 그 유해함을 손쉽게 퇴치하는 ‘사이다’ 복수, ‘도파민’ 유발 콘텐츠가 정말 많은 세상이잖아요. ‘호러’라는 키워드를 통해 현실의 그러한 유해함을 깊이 있게 성찰해보자는 게 앙스트 시리즈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박인성)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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