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복장 소박한 前 교황과 대조
교황 공관으로 거처도 이전할 듯
신학적·교리적 입장 큰 차이 없어
“심장은 늘 가난한 사람들 곁에…”
콘클라베 처음부터 다크호스 부상
새 교황 레오 14세(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69)가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학과 교리, 사목 방향을 대체로 계승하면서도 전통과 격식을 중시하는 모습에서 전임자와 차별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레오 14세가 선출된 지 이틀 뒤인 10일(현지시간) 바티칸미디어가 공개한 공식 초상사진에서부터 이 같은 차이가 드러난다. 레오 14세는 과거 신임 교황들이 해오던 대로 진홍색 모체타(mozzetta·어깨를 덮고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짧은 망토)와 화려한 자수로 장식된 영대(stola·목에 걸어서 가슴 앞에서 무릎 정도까지 늘어뜨리는 좁고 긴 띠) 차림으로 사진을 촬영했다. 목에 건 끈을 내려뜨려 가슴에 단 십자가는 앞으로 모은 두 손에 가려졌지만 황금빛으로 보인다. 교황권의 상징인 ‘어부의 반지’를 약지에 끼운 오른손이 앞으로 나와 있다.

이는 흰색으로 통일된 차림에 광택이 옅은 은빛 십자가를 즐겨 착용했던 프란치스코 전 교황과 대조를 이룬다. 프란치스코는 2013년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성베드로대성당 발코니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당시와 공식 초상사진 촬영 때에도 같은 복장이었다.
다만 레오 14세도 전통적 교황 복장을 100% 따르지는 않았다. 워싱턴포스트(WP)는 11일 “레오 14세는 옛 교황들의 화려한 진홍색 신발을 거부하고 전임자처럼 소박한 검은 구두를 신는다”며 예수회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황과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인 레오 14세 둘 다 ‘청빈 서약’을 한 수도회 사제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짚었다.
이 밖에 주일 미사 때 구석 창가에서 즉흥 설교를 즐겼던 프란치스코 교황과 달리 레오 14세가 원고를 미리 준비해 성베드로성당 중앙 발코니 로지아에 선 것도 차이점으로 꼽힌다.
레오 14세는 11일 교황 공관의 봉인을 해제하기도 했다. 지난달 21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으로 봉인된 지 3주 만, 자신이 새 교황으로 선출된 지 사흘 만이다. 바티칸 관계자는 “주유소 뒤편 소박한 숙소를 이용했던 프란치스코 교황과 달리 레오 14세는 공관으로 이사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예수회가 발행하는 잡지 ‘아메리카’의 전 편집장인 토머스 리스 신부는 WP에 “(레오 14세는) 교황으로서 모습을 드러낼 때 더 격식을 갖출 것으로 본다”며 “다만 프란치스코 교황을 무작정 흉내 내지 않으려 할 뿐, 그의 심장은 프란치스코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한다”고 말했다. 라틴어가 아닌 현지 언어로 미사를 집전하고, 평신도의 역할을 확대하며, 다른 교파·종교를 포용하는 내용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의 주요 개혁에 대한 헌신을 레오 14세가 추기경들에게 당부하는 등 신학적·교리적 입장은 전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설명이다.
이민자에 대한 관용적 태도 등에 미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에 놓일 수도 있다. 리스 신부는 “교황의 일은 ‘이웃을 사랑하라. 특히 가난한 자들, 굶주린 자들, 목마른 자들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라며 “(레오 14세가) 트럼프와 일부러 싸우지는 않겠지만, 트럼프가 싫어한다고 해서 복음의 메시지가 위축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레오 14세는 지난주 콘클라베(추기경단 비밀회의) 초반부터 다크호스로 떠올라 마지막 투표 때는 새 교황으로 선출되는 데 필요한 3분의 2 이상(89표)보다 훨씬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교도통신과 뉴욕타임스(NYT) 등이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레오 14세가 콘클라베 1차 투표에서 헝가리의 에르되 페테르 추기경, 이탈리아 출신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에게 근소하게 밀린 3위에 올랐으며, 2차 투표부터 1위로 부상해 4차 투표에서는 총 투표수 113표 가운데 약 80%인 105표를 받아 선출됐다고 12일 바티칸 소식통을 인용해 전했다.
추기경들은 콘클라베 참여 전 어길 경우 파문까지 당할 수 있는 비밀유지 서약을 하는 까닭에 득표수가 상세히 보도되는 것은 이례적이다. 다만 NYT도 이날 콘클라베 막전막후를 다룬 기사에서 “득표수가 세 자릿수에 가까워지자 (콘클라베를 주재하던) 파롤린 추기경이 참석자들에게 개표를 마칠 수 있도록 ‘자리에 앉아달라’고 요청해야 했다”고 전하는 등 비슷한 맥락의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NYT는 10여명의 추기경 취재를 통해 “파롤린 추기경은 1차 투표에서 압도하지 못해 분위기가 꺾였고, 보수파인 에르되 추기경의 지지세엔 한계가 있었다”며 “레오 14세는 인지도가 낮았으나 회의를 거듭할수록 호평을 쌓아갔다. 선교사와 수도회 출신에 페루 교구장, 교황청 주교성 장관이라는 다양한 이력을 갖춘 그에게 아메리카 대륙 추기경들을 중심으로 지지가 빠르게 모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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