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도중인 1944년 6월6일 이른바 ‘디데이’(D-Day)를 며칠 앞두고 영국 왕실이 발칵 뒤집혔다.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하겠다며 조지 6세 국왕(엘리자베스 2세의 부친)의 윤허를 요청한 것이다. 처칠의 계획은 디데이 당일 영국 해군 전함에 승선해 영국군의 상륙 모습을 직접 지켜보는 것이었다. 해군은 독일군의 갑작스러운 공격 가능성 등을 들어 난색을 표했다. 조지 6세 또한 강하게 반대했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총리 직위에 유고(有故)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고 나무랐다. 결국 처칠은 뜻을 접어야 했다.

얼핏 이해가 잘 안 가는 일이다. 처칠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일단 그가 영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직업군인 출신이란 점을 떠올릴 수 있다. 정계에 입문한 뒤로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2차대전 초반에 해군부 장관을 역임했다. 기본적으로 전쟁이 낯설지 않은 인물이었고 영국군, 그중에서도 해군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다만 호사가들은 처칠이 노회한 정치인임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라고 여긴다. 상륙작전 당일 전함 위에서 당당하게 전투를 지휘하는 자신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그 다음날 주요 일간지 1면을 도배하길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는 처칠 추종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런던시장 시절 펴낸 ‘처칠 팩터’(2018)라는 책에서 처칠이 상륙작전 당일 노르망디에 있고 싶어했던 것이 ‘영국의 존재감’을 의식한 행동이었다는 평가를 내린다.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세계 1위 강대국은 영국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지속되며 영국의 패권은 급격히 쇠퇴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시될 무렵 전쟁에 대한 영국의 기여도는 연합국 중 미국, 소련(현 러시아)에 이은 3위로 내려앉았다. 상륙작전 총지휘를 영국군 말고 미군 소속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이 맡은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존슨은 처칠을 ‘쪼그라든 섬의 거인’이라고 부르며 그가 상륙작전 현장에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영국 위상이 아직 건재함을 과시하려 했다고 분석한다.

오는 6일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에서 상륙작전 80주년 기념행사가 개최된다. 암 투병 중인 찰스 3세 국왕은 디데이 당일 영국군이 상륙한 지점에서 열릴 영국 측 의식만 참관한다. 미군 상륙 장소와 가까운 곳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주최로 거행될 국제 기념식에는 아들인 윌리엄 왕세자가 대신 참석한다. 정작 국제사회의 이목을 끄는 인물들은 따로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다. 두 사람의 만남을 계기로 러시아와 싸우는 우크라이나를 위한 미국 등 서방의 군사원조 내용 및 규모 등이 발표될 가능성이 크다. 처칠이 살아 있다면 80년 전과 비교해 훨씬 더 ‘쪼그라든’ 영국 처지에 어떤 반응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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