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민예관에서 한반도 유래 유물을 관람할 때의 감상은 다른 일본 박물관에서의 그것과 맛이 다르다. 누군가의 손때가 느껴진다고 할까. 자물쇠나 얼레빗을 보면 지금이라도 시골 할머니방을 뒤져보면 나올 것 같다. 가장 사랑스런 수집품인 연적은 그것을 책상 위에 두고 글을 썼을 선비를 떠올리게 한다. 유구한 역사성, 엄격한 예술성이 두드러지는 게 없지 않으나 민예관다운 소장품은 이런 것들이다.
미(美)의 창조자로 민중을 발견한 민예관 설립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심미안이 만들어낸 결과다. 그는 실용을 목적으로 했기에 견고하며, 병약하고 신경질적인 면이 없는 조선 일용품의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했다. 나아가 이런 물건을 만들어 낸 조선인들을 존중할 것을 요구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민중, 불가사의한 아름다움 창조
1914년 조선 도자기 연구자 아사카와 노리타가가 선물로 가져온 백자와의 만남은 야나기가 조선 예술에 눈을 뜨는 계기였다. 자연의 형상, 인간의 성정을 담은 매력에 매료되었다 한다.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영위한 민중은 미의 창조자로 격상되었다. 이제 야나기에게 미의 세계는 천부의 재능을 가진 소수의 예술가로만 구성되는 게 아니었다. 1925년 ‘민예’(民藝)라는 개념이 제시됐다. 당시로선 주목하는 이가 거의 없는 예술의 한 영역이었다.
“흔히들 일용품은 질이 낮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그러기에 굳이 기교를 부리거나 아취를 찾거나 하는 인연이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오히려 작위의 폐단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만듦새가 자연스럽고 솔직하며 질박하다.…달리 위대한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무엇인가의 힘이 불가사의를 연출하고 이것이 아름다움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조선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 아이누, 대만 원주민의 공예품에도 적용됐다.

야나기는 일용품 제작 현장을 직접 찾아 장인을 만나고, 제작환경을 확인했다. 일상의 아름다움이 창조되는 과정을 자신의 눈으로 들여다봤다. 1916년 8월∼1940년 10월 21번 조선을 찾았다. 1947년 간행한 ‘지금도 이어지는 조선의 공예’라는 책에는 당시 찍은 장인들을 사진이 실려 있다. 이 과정에서 모은 수집품은 “당시 일본인들이 열광한 고려청자나 부당하게 거래한 무덤의 석재 혹은 부장품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민예관 소장 한반도 유래 유물은 1600여 점으로 전체의 10% 정도를 차지한다.

◆“오직 하고자 하는 일은 조선에 대한 사랑”
“만들어진 작품에 대한 경이는 바로 만든 사람에 대한 경이가 아니어서는 안된다.”
야나기의 확신은 무척 단호하다. 예술을 사랑하면 그것을 만든 사람에 대한 존중은 당연힌 것이라 여겼다. 조선의 예술을 깊이 애정했던 그가 식민지 조선, 조선인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나름의 실천에 나선 이유다.
뛰어난 문장가였던 야나기는 여러 편의 글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성토했다. 최초는 1919년 5월 요미우리신문에 실은 ‘조선인을 생각한다’이다. 일제가 3·1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것을 비판한 글이었다.
“일본은 칼을 들이대고 저주를 퍼부었다. 평화가 그 희망이라면 왜 어리석은 짓을 거듭하며 억압의 길을 택하는 것일까.”
야나기의 글에서 반복되는 한국사에 대한 무지 혹은 오해가 적잖이 드러나지만 식민지 조선에 대한 안타까움, 일제의 무도함에 대한 공분으로 가득하다.
1922년 발표한 ‘사라지려는 조선건축을 위하여’는 가장 유명한 글이다. 조선총독부를 세운다며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을 헐어버리려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광화문이 끝내 헐려 세상에서 사라질 지라도 자신의 글을 통해 ‘불멸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매서운 결의가 특히 인상적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려 하는 그대(광화문)의 짧은 운명을 바로잡을 만한 힘은 갖지 못했다. 그러나 영(靈)의 세계에서 나는 그대를 기필코 불멸의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 사실 그대를 죽음에서 구할 자유가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글 속에서 그대를 불멸의 것으로 만들 자유만은 나에게 주어져 있다.…아아, 그대의 영이여, 갈 곳이 없거든 내게로 오라. 내가 죽거든 이 글 속에서 살아다오. 누군가 반드시 이 글을 읽어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의 존재가 다시 한 번 독자의 따뜻한 의식 속에서 그립게 기억될 날이 있을 것이다.”
이 글 덕분에 광화문은 헐리는 것을 면하고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졌다고도 한다. 실제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야나기는 광화문 이전을 “자비로운 조치인 양하는 것”이라며 “(이전된 광화문은) 형체는 남아도 생명없는 송장에 지나지 않을 것이 아닌가”라며 비난했다. 제자리에 본래의 모습 그대로 두라는 주장이었다. 1920년대 말 원래 자리에서 뽑혀 경복궁 동쪽 담장으로 옮겨간 광화문이 원래 자리에, 제 모습으로 돌아온 건 2010년이다.
1924년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은 조선 예술에 향한 야나기의 격한 애정이 이뤄낸 또 다른 결과였다. 조선민족미술관이 민족 고유문화를 지키는 실질적인 방책일 것으로 믿었다. 그것을 통해 조선미를 전하고자 했다. 앞선 1921년에는 도쿄에서 일본 최초의 ‘조선민족미술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야나기는 스스로 조선의 학문이나 정치에 대해 문외한임을 고백했다. 그런 사람이 조선의 현실에 공분하고, 글과 전시회 등을 통해 조선예술을 지키고자 한 이유는 뭘까.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자 하는 일은 오직 조선에 대한 사랑을 유발시키려는 데 있다. 나는 인정의 따스함을 믿고 이것으로서 이루어질 마음과 마음의 깊은 이해를 확실히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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