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하대 모랫바닥을 파고들어가 더듬이와 턱을 내밀고 먹이를 기다리는 생물이 있다. 물고기가 지나가자 잽싸게 낚아채어 모랫바닥 깊숙이 끌고 들어간다. 이 거대한 생물이 바로 왕털갯지렁이(Eunice aphroditois)다. 일반적으로 갯지렁이는 물고기의 먹이로써 낚시 미끼로 쓰이는데 왕털갯지렁이는 반대로 물고기를 먹이로 삼는다.
왕털갯지렁이는 털과 마디가 매우 많은 털갯지렁이과에 속한 종으로 너비는 1~1.5㎝이지만 길이가 50㎝~3m로 다른 갯지렁이에 비하여 덩치가 큰 편이다. 몸은 진한 갈색에 무지갯빛을 띠고 5개의 밋밋한 더듬이가 있으며 마디 중간 부분에는 아가미가 있다. 몸의 마디는 대략 347개 이상으로 다리를 이용하여 모랫바닥을 기어 다닌다.
왕털갯지렁이는 우리나라 거문도 등 남해 일부 지역과 제주도 바다의 10~40m의 수심에 산다. 왕털갯지렁이는 작은 새우부터 자신보다 더 큰 물고기까지 턱으로 사냥을 하는 야행성 육식동물이다. 턱은 단단한 피부를 형성하는 키틴질로 이루어져 먹이를 반으로 자를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강하고 딱딱하다.
재미있는 일화로, 2000년대 후반 영국의 어느 수족관에서 갑자기 물고기가 훼손되거나 사라지는 일이 발생한 적이 있다. 수족관 관리자들은 원인을 알 수 없었는데 범인은 수족관 모랫바닥에 사는 왕털갯지렁이로 판명되었다. 더 놀라운 점은 왕털갯지렁이를 수족관에서 꺼내는 과정에서 몸이 잘렸지만 죽지 않고 재생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저서 환경에서는 무법의 포식자로 알려졌지만 사실 왕털갯지렁이는 생태계를 교란하거나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우렁각시처럼 묵묵히 모랫바닥을 구석구석 청소해주는 왕털갯지렁이도 자세히 보면 예쁜 우리 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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