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 못 받은 봉제업체들 존폐 위기
14세 이상 100명 중 2명꼴로 피해
엄정한 단죄로 사기의 토양 없애야
‘사기 공화국’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보이스피싱이나 주식 리딩방 사기 피해를 본 건 아니다. 전 펜싱 국가대표 선수를 둘러싼 희한한 사건 때문도 아니다. 주변에서 알음알음으로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을 자주 본다. “4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납품한 물건이 23만원에 팔리는 걸 보면 어휴…. 우린 대금도 못 받았는데….” 뭔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한결같이 딱하기 짝이 없는 사기 사건들이다. 사기의 세계는 정말 요지경이다.
봉제업을 하는 50대 A씨는 지난 5월 아웃도어업체 B사의 관계자에게서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골프웨어 브랜드 론칭을 준비 중인데 물품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직원 1명을 두고 봉제업체 2곳과 협력해 의류를 주문받아 제작·납품하는 그로선 큰 기회로 보였다. 대금을 납품하는 다음달 말일까지 지급하는 좋은 조건이었다.
가격 협상이 잘돼 계약할 때 이상하긴 했다. 계약당사자가 C사로 돼 있었다. B사 사무실에서 B사 직책 명함을 쓰는 이들을 만나 B사 이메일로 진행한 계약이다. 회사 관계자는 “사장님이 운영하는 같은 회사라 문제없다”는 취지로 얘기했다. C사 대표로 B사 부사장이 돼 있고 나중에 받은 작업지시서 결재란에 B사 사장·부사장 서명까지 있어 의심하지 않았다. 7∼8월 4차례에 걸쳐 B사가 정한 물류창고로 총 1억6400만원어치 물건을 납품했다.
후속 얘기는 전형적인 흐름이다. 익월 대금지급 조건은 지켜지지 않았다. B사 측은 분할 지급으로 말을 슬쩍 바꾸더니 이마저도 차일피일 미뤘다. 피해 업체는 A씨 외에도 10곳이나 더 있다. 안정적인 거래처를 잡았다는 영세 봉제업체의 꿈은 산산조각 났다. 업체당 2200만∼5억4600만원, 총 피해액이 16억원에 이른다. 실값 등과 재단·봉제 대금을 치러야 다음 작업을 하는 업체들은 미수금 탓에 존폐 위기에 내몰렸다.
건설회사에서 퇴직한 40대 D씨는 2021년 3월 물류센터 개발사업을 준비하던 중 대학 후배라는 E씨를 만났다. 후배는 구체적인 사업 계획과 설계자료를 쥐고 있었다. 후배는 50대 50 지분 사업을 하자면서 부지 매입대금 10억원을 투자해 달라고 했다. 경남 양산까지 내려가 땅을 보고 괜찮은 사업이라고 봐 투자했다. 역시 이후가 문제다. “형”, “동생” 하며 가까워진 그가 연락을 피했다. 다른 3명에게서 40억원 넘는 돈을 빌린 사실도 알았다. 땅 구입이 끝나 사업이 정상궤도에 오르자 “나 몰라라” 하는 것이다. D씨는 투자 이익은 고사하고 대여금 회수가 불가능할 수도 있어 전전긍긍이다.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그렇게 답답할 수 없다. ‘중견기업, 후배라고 믿고 큰돈을 넣은 게 잘못 아닌가’, ‘민사소송을 내면 되지 않는가’. 당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똑똑하다고 자신할 일 아니다. 법원장이 보이스피싱으로 수천만원을 뜯기고 여성이 성전환했다는 여성과 결혼하려고 하는 세상이다. 그렇게 당하고서도 보이스피싱 사기는 여전해 상반기 피해액만 하루 평균 25억원이다. ‘사기 공화국’의 사기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의 ‘전국범죄피해조사 2020’에 따르면 2020년 사기 피해는 96만6276건에 이른다. 인구 10만명당 피해 건수가 2100건으로, 2012년 이후 가장 높다. 14세 이상 국민 100명 중 2.10명꼴로 사기를 당했다는 얘기다. 피해를 당하고서도 ‘돈을 전혀 되찾지 못했다’는 응답자 비율이 73.43%이다. 법적으로 구제받으려면 변호사를 선임하고 3∼4년 지루한 소송을 거쳐야 한다. 서민이나 자영업자가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버텨낼 재간이 없다.
사기는 ‘칼 들지 않은 살인’이나 다름없다. 개인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완전히 망가뜨린다. 사기를 치고서도 4명 중 3명이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서 사기는 수지맞는 일이다. 남의 돈으로 백화점에서 골프의류를 팔고 물류창고를 지으면 ‘사기꾼’ 대신에 ‘사장님’ 소리를 들으니…. 엄정한 단죄로 사기의 토양을 없애지 않으면 남의 등을 처먹는 피해자는 오늘도, 내일도 계속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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