習 “두 나라가 사이좋게 지내는 길에
인류 미래·운명 달려” 관계 개선 강조
블링컨 “대만 독립 지지 안 해” 화답
악화일로 국면서 ‘극적 반전’ 가능성
블링컨 “中, 北 대화 압박할 특별한 위치”
미사일 도발 중단 등 영향력 행사 촉구
“中, 러에 살상무기 제공 않겠다고 약속”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19일 5년 만에 중국을 찾은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을 만나 “두 나라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올바른 길을 찾는 것에 인류의 미래와 운명에 달려 있다”며 양국 관계의 정상화를 강조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경제·군사분야 등에서 악화일로로 치닫던 미·중관계의 극적 반전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블링컨 장관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 잇단 도발을 멈추게 하기 위한 중국의 영향력 행사도 촉구했다.

중국 외교부 등에 따르면 시 주석은 이날 오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블링컨 장관 일행을 만나 “지구는 중국과 미국의 각각의 발전과 번영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고 양국의 공동 이익은 존중돼야 하며, 각각의 성공은 서로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기회”라고 말했다.
시 주석은 “중국은 미국의 이익을 존중하며 미국에 도전하거나 대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도 중국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시 주석은 “바이든 대통령과 지난해 (인도네시아) 발리에서의 공통된 합의에 전념하고, 긍정적인 발언을 행동으로 옮겨 중·미 관계를 안정시키고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시 주석은 2022년 11월 발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양국 정상으로서는 처음 대면해 미·중 간 책임 있는 소통 유지와 중국과 대만 양측의 일방적 현상변경 조치 반대 등에 합의한 바 있다. 이때 시 주석은 대만 문제는 ‘중국의 핵심 이익 중에서도 핵심’이라며 양국 관계에서 넘어서는 안 되는 ‘레드라인’이라고 강조했다.

블링컨 장관은 시 주석에게 미국과 중국이 책임감 있게 관계를 관리할 의무가 있고 세계의 이익에 부합할 것이란 바이든 대통령의 인사말을 전한 뒤 “미국은 신냉전을 추구하지 않고, 중국의 체제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며, 동맹관계를 강화해 중국에 반대하지 않고,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으며, 중국과 충돌한 의사가 없다”고 했다고 중국 외교부가 전했다.
이날 회동은 두 개의 긴 테이블 한쪽에 블링컨 장관 일행이, 다른 한쪽에 왕이(王毅)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과 친강(秦康)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 등 중국 측 인사들이 마주 보는 상태로 각각 앉고, 시 주석이 가운데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는 듯한 형태로 진행됐다. 앞서 2018년 6월 시 주석이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미 국무장관과 면담 시엔 탁자를 사이에 둔 채 나란히 앉아 대등한 위치에서 면담을 진행했다. 이날 좌석 배치에서 중국이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는 미국에 대외적으로 당당하게 대응하고 물러서지 않는다는 암묵적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블링컨 장관은 회동 뒤 베이징 미국대사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중국은 북한이 대화에 나서게 하고, 위험한 행동을 중단하게 압박할 ‘특별한 위치’에 있다”며 중국의 대북 영향력 행사를 촉구했음을 시사했다. 그는 또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 중국은 러시아에 살상무기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며 “대만해협과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도발적인 행동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고 전했다.

블링컨 장관이 시 주석에게 바이든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타진했는지는 이번 회동의 핵심 관심사다. 시 주석이 이를 받아들이면 지난해 11월 발리에 이어 바이든·시진핑 2차 대면 정상회담이 성사돼 오는 9월 인도 뉴델리 개최 G20 정상회의, 11월 미 샌프란시스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등에서 만날 가능성이 있다.
만남이 성사되면 이번 블링컨 장관 방중에서 양측이 합의에 이르지 못한 민감한 문제인 군사분야 소통 재개를 포함한 본격적인 해빙 모드로의 전환 가능성이 점쳐진다. 다만 군사분야의 경우 대화 물꼬를 트는 것이 현재로선 쉽지 않아 보인다. AP통신은 2021년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중국이 미국 측의 고위급 군사회담 요청을 12번 이상 거부하거나 무시했다고 보도했다.
전날과 이날 시 주석과의 회동 전 이뤄진 블링컨 장관과 왕 위원, 친 부장과의 회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도출되지 않았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지속적인 견제 의지를, 중국은 대만 문제에 대한 미국의 개입 반대를 거론하는 등 기존 레드라인에 대한 입장을 고수했다.
왕 위원은 ‘중국 위협론’ 중단, 중국에 대한 ‘불법적 독자제재’ 철회, 중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압박 포기, 중국 내정에 대한 간섭 금지 등을 요구한 뒤 “대화냐 대항이냐, 협력이냐 충돌이냐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을 압박했다.
블링컨 장관과 친 부장은 전날 오후 2시35분(현지시간)부터 회담과 업무 만찬을 포함해 8시간 가까이 마라톤 회담을 했다. 양측은 양국 간 관계가 충돌로 비화하지 않도록 지속적 소통을 강조했다.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양국은 △고위급 접촉 유지 △미중 관계 이행지침에 대한 협의 진전 △현안 해결 위한 미중 워킹그룹 협의 △인적 및 교육 교류 확대 등 4가지 분야에서 합의를 봤다. 중국 외교부는 블링컨 장관이 친 부장을 미국으로 초청했고, 친 부장은 편리한 시기에 미국을 방문할 용의가 있다고 덧붙였다.
◆美·中 사이 ‘새우등 韓반도체’ 허리 펼까
19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는 등 미국과 중국 간 대화의 물꼬가 터지면서 양자 간 택일 기로에 있는 한국 산업계의 고민을 덜 수 있을지 주목된다. 미국이 중국에 대한 디커플링(탈동조화)이 아닌 ‘디리스킹(위험제거)’에 초점을 맞춘다면 국내 기업들의 불확실성도 다소 해소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나온다.

미국이 대화에 적극적으로 임한 것은 모든 공급망에서 중국을 철저히 배제하는 디커플링을 자제하겠다는 의사 표현으로 해석된다. 특히 이번 회담이 군사분야를 제외한 경제에 방점이 찍히면서 이런 해석에 더 힘이 실린다. 추후 재닛 옐런 재무장관과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 등 미국 경제 관료의 방중 가능성이 꾸준히 언급된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양국 경제분야 고위급 소통이 재개될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보인다.
옐런 장관은 이미 13일(현지시간) 미국 의회에서 “중국과의 디커플링 시도는 재앙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며 중국과의 전면적인 경제관계 단절의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블링컨 장관의 방중에 앞서 마이크로소프트 공동창업자 빌 게이츠가 중국을 방문해 시 주석을 만난 것 역시 정부 간 화해 무드 조성에 앞서 민간교류가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거론된다.
미·중 사이의 훈풍은 미국의 대(對)중 수출통제에서 유예를 받은 한국 기업들의 유예기간 연장 등에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최근 미국은 수출통제 관련 기존 유예조치를 연장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지만, 국내 반도체 업계는 미·중관계 개선에 따라 1년 단위의 유예기간 연장을 넘어 중국 사업이 전반적으로 보장돼야 불확실성 해소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한편 한국 정부는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보조금 지급 요건상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광물을 조달해서는 안 되는 중국 기업을 명확히 정의해 달라고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18일 미국 정부 관보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미국 재무부가 지난 3월31일 공개한 IRA 전기차 세액공제 세부지침 규정안에 대한 공식 의견을 제출했다. 미 재무부는 규정안 발표 당시에는 외국 우려 단체를 정의하지 않았으며 향후 공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IRA는 법에서 외국 우려 기업을 중국, 러시아, 북한, 이란 정부의 소유, 통제, 관할에 있는 기업으로 정의한 인프라법의 규정을 원용했는데, 이 정의대로라면 사실상 모든 중국 기업이 포함될 수 있다. 전기차 업계에서는 중국이 핵심광물 공급에서 차지하는 절대적인 비중을 고려하면 중국산 핵심광물을 완전히 배제하는 게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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