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9500만년전 바다였던 보졸레 토양 미네랄 풍부한 토양/추락한 보졸레 누보 대신 보졸레 빌라쥐와 텐 크루 인기/도멘 장 로롱 ‘내추럴 와인 아버지’ 쥘 쇼베의 양조기법 이어 받아
기다란 서핑 보드를 옆에 끼고 앞을 지그시 응시하는 남자. 자신의 한계에 도전할 더 큰 파도를 기다리는 걸까. 하지만 서퍼가 바라보는 곳은 바다가 아닌 완만한 언덕을 따라 파도가 물결치듯 펼쳐진 포도밭. 서퍼와 포도밭이라니.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가벼운 보졸레 누보 어떻게 만들까
와인을 잘 몰라도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는 한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매년 11월 세 번째 목욕일 ‘누보 데이’에 전세계적으로 보졸레 누보 와인이 출시됩니다. 보졸레 누보는 프랑스 부르고뉴 최남단 보졸레 지역에서 생산된 햇와인을 뜻합니다. 탄닌은 거의 없고 인공적인 과일사탕 맛이 특징인 가볍게 마시는 와인이죠.

양조방식 때문입니다. 보졸레에서는 탄닌을 적게 뽑아내기 위해 ‘카보닉 마세라시옹(Carbonic Maceration)’, 즉 ‘탄산침용’ 방식으로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통에 포도를 집어넣고 이산화탄소(CO2)를 부은 뒤 뚜껑을 닫아 발효시키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실제 보졸레에서는 ‘세미 카보닉 마세라시옹’ 방식으로 만듭니다. 좀 복잡한데 3단계 발효과정을 거칩니다. 먼저 통에 포도 송이를 통째로 넣으면 포도껍질에 묻어있던 효모때문에 자연스럽게 1차 발효가 진행되면서 CO2가 발생합니다. 이때 뚜껑을 닫으면 CO2가 가득 차면서 산소가 점차 사라지죠. 산소가 없으면 효모는 활동을 중지합니다. 대신, 포도 알갱이 안에 있는 효소(엔자임·enzyme)가 2차 발효를 시작합니다. 바로 이때 바나나, 체리 사탕같은 보졸레 누보 특유의 달콤한 과일사탕향이 얻어집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3차 발효에 들어갑니다. 효소는 기껏해야 3% 정도의 알콜도수만 만들어 내기 때문에 알코올이 더 필요합니다. 발효통 아래 깔려있는 포도즙은 1차 효모발효된 즙으로 압착하지 않고 포도 무게때문에 발효 통에서 저절로 흘러나온답니다. 이 프리런 주스(효모발효 즙)와 껍질에 맺어있는 즙(효소발효 즙)을 짜내 둘을 섞은 뒤 다시 효모를 넣어 3차 발효하면 세미 카보닉 방식이 완성됩니다.

탄닌은 포도 껍질에 많아요. 따라서 보통 레드와인 양조때 껍질에서 탄닌이 잘 빠져나오도록 발효 통 위로 떠 오르는 섞어주는 ‘펀칭다운’이나 ‘펌핑오버’ 등을 통해 탄닌을 뽑아냅니다. 하지만 보졸레 누보는 이를 생략하고 껍질과 함께 발효하는 침용시간도 매우 짧답니다. 보통 2차 엔자임 발효를 2∼3일 정도 하다가 즙을 빼내 3차 발효에 들어가면 엄청 가벼운 보졸레 누보 스타일 와인이 얻어집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둔 보졸레 누보의 인기는 싸늘하게 식은 지 오래입니다. 장삿속으로 탄생한 저급한 보졸레 누보 와인이 고급 와인으로 포장돼 비싸게 팔리고 시장을 왜곡시킨다는 거센 비난에 직면하면서 하루아침에 보졸레 인기는 날개를 잃고 곤두박질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보졸레 생산자들이 다시 떼루아 중심의 프리미엄 와인으로 눈을 돌리면서 보졸레 빌라쥐급 와인과 최상급 ‘텐 크뤼(10 Gru)’ 보졸레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2차 엔자임 발효를 2주 정도 길게 진행하면서 껍질과 함께 두면 좀 더 탄탄한 맛을 보여주는 보졸레 와인이 탄생하죠. 따라서 텐 크뤼 보졸레는 인공적인 과일사탕맛 일변도의 보졸레 누보와는 맛의 차원이 다릅니다. 텐 크뤼는 크렌베리, 체리, 산딸기 맛이 풍성하고 스파이시한 향신료도 느껴집니다. 탄닌이 엄청 파워풀해 잘 만든 보졸레 와인을 숙성시키면 부르고뉴 피노누아와 구별하기 거의 힘들답니다. 텐 크뤼 보졸레는 10년 정도 장기 숙성도 가능해요.

◆보졸레는 부르고뉴에 속할까 아닐까
보졸레는 부르고뉴에 속한 와인 생산지일까요. 아닐까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북쪽은 마꼬네(Maconnais·마꽁 Macon ), 남쪽은 리용(Lyon)에 살짝 걸쳐있는 보졸레는 사실 행정구역은 부르고뉴에 속합니다. 그러나 와인업계에서는 별개의 와인 산지로 취급합니다. ‘부르고뉴와인협회(BIVB)’와 ‘인터보졸레(Inter Beaujolais)’가 별개 단체로 존재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병에 ‘Bourgogne’라고만 적힌 레지오날급 와인들은 보졸레 포도를 블렌딩할 수 있습니다. 행정구역상 보졸레가 부르고뉴 속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죠. 레지오날급은 부르고뉴 전역에서 생산되는 포도를 사용한 와인입니다. 따라서 피노누아 100%로 알고 마시는 부르고뉴 레지오날급 와인들에는 사실 보졸레 포도가 블렌딩 된 경우가 꽤 있답니다.

품종은 바로 보졸레 생산 품종의 98%를 차지하는 ‘가메(Gamay)’랍니다. 피노누아처럼 껍질이 얇고 과일 풍미가 좋지만 숙성잠재력은 피노누아보다 조금 떨어집니다. 가메는 어떻게 보졸레를 대표하는 품종이 됐을까요. 보졸레는 로마시대부터 와인을 재배했을 정도로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품종입니다. 그런데 1395년 필립 볼드 2세가 부르고뉴에서 가메를 모두 뽑아버리라고 명령하면서 가메 생산은 보졸레에 집중됩니다.


보졸레를 동서로 가로 지르는 니절랑 강(Nizerand River)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의 품질이 크게 차이납니다. 보통 보졸레 누보는 남쪽에서 생산된 와인이고 빌라쥐급과 텐 크뤼는 모두 강 북쪽에서 나옵니다. 토양이 확연하게 다르기 때문이죠. 북쪽은 부르고뉴 마꼬네와 비슷한 그라니트(화강암)와 쉬스트(편암). 이런 토양에선 우아한 고품질 와인이 생산됩니다. 포도나무 뿌리가 생존을 위해 영양분을 찾아 딱딱한 돌을 뚫고 땅속 깊숙하게 내려 가면서 다양한 미네랄 성분을 끌어 올리기 때문이죠. 더구나 텐 크뤼 마을에는 50년 수령의 올드바인이 많아 이런 성분이 극대화됩니다. 반면 평야지대인 남쪽은 반짝거리는 노란색 조그만 돌멩이(골드스톤)가 섞인 모래토양. 이런 모래에서는 가벼운 스타일의 와인이 생산됩니다.

텐 크뤼는 최고의 보졸레 와인을 생산하는 마을이니 이름 10개를 알고 있으면 좋은 보졸레 와인을 고를 때 큰 도움이 됩니다. 북쪽부터 순서대로 생따모르(Saint Amour), 줄리에나(Julienas), 쉐나(Chenas), 물랭아방(Moulin a Vent), 플뢰리(Fleurie), 시로블(Chiroubles), 모르공(Morgon), 레니에(Regnie), 꼬뜨 드 브루이(Cote de Brouilly), 브루이(Brouilly)랍니다. 물랭아방이 장기숙성 가능한 가장 파워풀한 보졸레 와인으로 유명하고 모르공도 이에 못지않습니다.

◆쥘 쇼베 내추럴 와인 전통 잇는 ‘보졸레 장인’ 장 로롱
1711년부터 와인을 빚기 시작해 3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생산자 메종 장 로롱(Masion Jean Loron)은 이런 보졸레에서도 산화방지제인 이산화황(SO2를) 전혀 쓰지는 않는 내추럴 와인을 2009년부터 생산합니다. 무엇보다 ‘내추럴 와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쥘 쇼베(Jules Chauvet)의 내추럴 와인 양조 기법 등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현재 장 로롱은 디종과 미국에서 공부한 후 돌아온 8대손 자비에 바르베(Xavier Barbet)가 오너입니다. 2016년부터 바르베가 가장 신뢰하던 부르고뉴, 보졸레 와인 전문가 필립 바르데(Philippe Bardet)가 와이너리가 경영을 이끌고 있답니다. 또 쥘 쇼베에게서 양조기법을 직접 전수받은 장 피에르 로데(Jean-Pierre Rodet)가 수석 와인메이커로 와인양조를 진두지휘하며 보졸레가 고향인 양조책임자 프레데릭 메그네(Frederic Maignet)가 장 로롱의 양조 기술 연구·개발을 이끕니다.


보졸레는 전반적으로 온화한 기후. 서쪽 보졸레 산맥이 비구름을 막아주고 동쪽 쏜강(saone river)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덕분이죠. 특히 180만년전 지각활동으로 형성된 ‘열곡(Rift)’ 지역으로 1억9500만년전까지 바다였음을 입증하는 산호초 화석 등이 발견됩니다. 그만큼 포도밭은 다양한 미네랄을 잔뜩 움켜쥐고 있어 와인에 복합미를 부여합니다. 장 로롱은 이런 떼루아의 복합미를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이 SO2를 사용하지 않는 내추럴 방식이라 믿고 내추럴 와인을 고집합니다. 현재 30ha 이상의 포도밭을 오가닉 농법으로 경작합니다.


장 로롱 ‘리프트(Rift)’ 시리즈는 레이블에 서퍼가 포도밭 언덕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넣어 상상력을 자극하네요. 보졸레 떼루아의 지질학적 역사와 특징을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최근 한국을 찾은 메종 장 로롱 장 프랑수아 샤보(Jean Francois Chabod)를 인터뷰했습니다. 장 로롱 와인들은 현재 WS통상에서 단독 수입합니다.


장 로롱 리프트 69 로제(Jean Loron RIFT 69 Rose)는 가메 100%로 빚은 독특한 로제 와인입니다. 가메로 만든 로제는 매우 드물답니다. 프랑스 프로방스 등 대표적인 로제 생산지역에선 대부분 그르나슈 품종으로 로제를 빚어요. 보졸레 역시 가메로 로제를 만드는 생산자는 한두명에 불과할 정도. 생산량도 아주 적어 장 로롱의 실험 정신이 돋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르나슈 로제보다는 보졸레 로제가 아로마의 집중도가 훨씬 더 뛰어나군요. 딸기, 라즈베리, 레드 커런트 등 과일향과 장미꽃향, 허브, 미네랄이 비강에 확연하게 전해집니다. 수확부터 병입까지 SO2를 전혀 쓰지 않고 중력방식으로 부드럽게 압착해 양조합니다. 특히 짧지만 몇주 정도 죽은 효모와 함께 숙성하는 ‘리 숙성(Surlees)’을 진행해 빵이나 너트류의 적절한 효모 풍미도 따라옵니다.


장 로롱 리프트 69 보졸레 빌라쥐(Jean Loron RIFT 69 Beaujolais Villages)는 보졸레 빌라쥐 AOC에서 생산된 가메 100% 와인입니다. 블랙베리, 블랙체리 등 검은 과일향이 지배적이고 긴 침용시간을 거쳐 농밀하면서도 묵직한 탄닌과 바디감도 느껴집니다. 화강암 언덕에서 자란 가메를 사용해 미네랄도 풍부하고 감초, 후추 등 스파이시한 허브향이 긴 여운을 남깁니다. 리프트 69 와인들은 레이블에 아예 ‘GAMAY NOIR’로 적어 정체성을 확연하게 보여줍니다.


장 로롱 리프트 71(Jean Loron RIFT 71)은 2억년전에 형성된 부르고뉴 마꼬네 빌라쥐 AOC에서 생산된 샤르도네 100% 와인입니다. 마꼬네 석회암 자갈토양의 떼루아를 잘 담은 와인으로 배, 복숭아, 키위, 파인애플향이 돋보이고 특히 열대과일향이 긴 여운을 남깁니다. 전형적인 부르고뉴 사르도네의 우아한 아로마가 특징이며 버터 풍미도 살짝 느껴집니다. 리프트 시리즈의 ‘69’와 ‘71’은 모두 떼루아를 구분하는 지질학적 번지수를 뜻합니다.

장 로롱 리프트 496(Jean Loron RIFT 496)은 부르고뉴 레지오날급 피노누아입니다.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좋아 좋은 산도와 당도를 얻을 수 있는 해발고도 496m의 포도밭에서 생산된 피노누아 100%로 빚으며 7∼8개월 리 숙성을 진행합니다. 늦수확한 포도를 사용하지만 일교차 덕분에 신선한 산도를 움켜쥐었고 검붉은 과일향과 향신료의 복합적인 아로마가 느껴집니다.


장 로롱 샤또 드 라 피에르-레니에(Jean Loron, Chateau De La Pierre-Regnie)에는 보졸레 텐 크뤼중 가장 늦은 1988년에 편입된 레니에 마을에서 생산된 가메 100% 와인입니다. 역시 텐 크뤼 와인답게 집중도가 매우 뛰어나군요. 장 로롱은 레니에 마을에 12ha의 포도밭을 갖고 있는데 모두 수령 50년이 넘는 올드바인입니다. 화강암 토양에 깊게 뿌리내린 포도나무는 다양한 미네랄을 끌어 올려 입안에서도 가득 미네랄이 느껴집니다. 또 하나. 레니에 마을 토양에는 화산 토양까지 섞여있어 미네랄이 더욱 풍성하게 느껴집니다. 2019 빈티지는 매력적인 블랙 커런트, 레드 커런트, 딸기향과 검은 후추향이 어우러집니다.

장 로롱 꼬뜨 뒤 론 라 갈레티에르(Jean Loron Cotes du Rhone La Galetiere)는 론 지역 그르나슈, 시라, 무르드베드르 품종으로 만든 와인입니다. 이 세 품종을 섞는 ‘GSM 블렌딩‘은 남부 론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수학공식처럼 쓰입니다. 그르나슈는 복합미, 시라는 바이올렛 등 꽃향기를 담당하고 무르베드르가 구조감을 더합니다. 남론과 지중해 연안의 척박한 석회암 지대에선 포도나무와 강한 허브 정도만 자라는데 ‘가리그(Garrique)’로 불리는 말린 허브향이 긴 여운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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