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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예능 이을 전수관에 내 모든 것 내어주니 여한이 없어” [나의 삶 나의 길]

, 나의 삶 나의 길

입력 : 2022-05-18 06:00:00 수정 : 2022-05-17 22: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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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명인 이영희

음악·춤에 이끌렸던 막내딸
예인 많아 풍류 넘쳤던 군산 번화가서 태어나
명기와 퇴기의 춤을 보고 승무·살풀이 등 배워
가야금은 이덕열·이운조·김윤덕 등에 사사

대학 사회학과 진학한 국악인
원하는 대학에 국악과 없어 명인 찾아서 배워
국악예술학교 교사로 취업하면서 음악 확장
20년간 교편 기간이 지금 자신을 만든 원동력

국악 알리기·후학 양성에 매진
박범훈·김덕수 등 국악계 명사 제자로 길러내
국악협회 이끌며 12년간 전통예술 발전 이뤄
마지막으로 200억대 집·토지 아낌없이 기부
후학 양성을 위해 일생 일군 200억원대의 땅과 집을 내놓은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이영희 명인. 우리나라 국악계에서 각각 일가를 이룬 박범훈(피리, 중앙대 총장 지냄), 김영재(거문고 및 해금, 국가무형문화재 거문고산조 보유자), 최태현(해금 명인, 중앙대 명예교수), 이종대(피리 명인, 부산대 명예교수), 김덕수(타악,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등이 이 명인의 제자다. 하상윤 기자

“몸을 놔준 상태에서 손끝으로 내 에너지를 쏟으면서 (가야금) 줄을 뜯으면 굉장히 좋은 소리가 나와요. ‘이완된 상태에서 상체의 무게를 손끝에 실어라’ 저는 그렇게 표현해요.”

일제강점기인 1938년 전북 군산 번화가 신발가게 막내딸로 태어난 소녀는 일생을 가야금에 바쳤다. 어려서부터 흥도, 호기심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소녀는 음악과 무용에 무척 끌렸다. 일본인 등 부유한 사람들의 집에서 여는 생일이나 환갑 잔치에 가 예인들 춤을 보는 게 낙이었고, 정월 보름이나 추석 명절 때 온종일 ‘풍장꾼’(풍물패) 뒤를 따라다니며 풍물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다 군산 명기(名妓)이자 춤꾼인 도금선을 보고 춤에 빠졌다. 유명한 퇴기(退妓)였던 김향초에게 승무와 살풀이 등 전통춤을 배웠다. 그러다 김향초가 타는 가야금 매력에 반했다. 이후 ‘풍류객’ 이덕열, ‘가야금 명인’ 이운조를 만나 평생 삶이 될 가야금 세계에 발을 디뎠다. 대학생이 돼서도 가야금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 김윤덕 문하에서 가야금뿐 아니라 거문고도 익혔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교사로 몸담은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는 보물 창고와 같았다. 당대 최고 수준 명인·명창이었던 선배 교사의 가르침을 통해 국악을 두루 섭렵하며 음악 세계가 확장됐다. 음악교육가로서도 게으르지 않았다. 박범훈(피리, 중앙대 총장 지냄), 김영재(거문고 및 해금, 국가무형문화재 거문고산조 보유자), 최태현(해금 명인, 중앙대 명예교수), 이종대(피리 명인, 부산대 명예교수), 김덕수(타악,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등 지금은 우리 국악계 태두(泰斗)가 된 제자들을 길렀다.

아무리 기운이 없어 발발거리다가도 가야금을 안고 타기 시작하면 기가 팔팔 나는, 쥐어짜낸 힘으로 타는 게 아니라 몸 자체 에너지로 타는 이치를 알기까지 30년 가까이 걸렸다. 어느덧 나이 쉰셋에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가 됐다. 가야금산조는 가야금 독주 음악이고, 가야금병창은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판소리 한 대목이나 단가를 부르는 음악이다. 국보급 연주자가 됐지만 안주할 수 없었다. 갈수록 위상이 쪼그라들고 배우겠다는 젊은이가 줄어드는 국악계 앞날이 염려돼서다. 나이 예순둘에는 국악 연주자 권익 보호와 전통문화 발전 기여를 위해 설립된 한국국악협회를 맡아 12년간 이끌며 명실상부한 국악계 대표 조직으로 성장시켰다. 협회를 나와서도 사재를 털어가며 후학 양성 등 국악 발전에 매진하고 있다.

이제 어느덧 여든넷 할머니가 된 올해는 200억원 상당의 자택과 토지 5474㎡(약 1656평)를 문화재청에 기부했다. 독신으로 살면서 스스로에겐 휴지 한 장 허투루 안 쓸 만큼 근검절약해 모은 재산이다. 이는 국가무형문화재 예능전수교육관 건립에 쓰인다. 이영희 명인의 삶 이야기다. “살아온 길이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자랑 세울 만한 발걸음이 아니었다”고 하는 이 명인을 지난 9일 경기 성남 금토동 자택에서 만났다.

 

―예인 집안도 아닌데 어려서부터 음악에 소질이 있었나 봅니다.

“소질이 있다기보다 춤과 노래 하는 모습이 좋아 흉내내다 보니까…. 당시 일제가 호남 지역 쌀을 군산항에 모아 일본으로 가져갈 때라 군산은 일본인 지주가 많았고 상업도 활발했어. 최고 번화가였던 영동 10번지 이층집에서 1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 다행히 (그 시절) 유명한 ‘만월표’ 고무신 만드는 회사 사장이었던 친척분 도움으로 어머니가 신발 대리점 같은 것을 했는데 장사가 잘돼 어려움 없이 자랐어. 군산은 작지만 넉넉한 곳이라 부잣집이 많았고 잔치가 자주 열려 예인들 활동을 볼 기회가 자주 있었고. 특히 ‘도금선’이란 분이 춤을 멋들어지게 잘 춰 얼마나 넋을 놓고 봤던지, 배우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어. 또 남들 뭐라 하든 풍장꾼들 뒤를 따라다니며 구경했는데 지금 이렇게 되려고 그런 걸 좋아했던 것 같애.”(웃음)

―잔칫집 기웃거리며 쏘다닌다고 어머니가 혼내거나 만류하지 않으셨나요.

“아니야. 어머니가 상업을 해서 그런지 좀 깬 분이었고, 내가 하고 싶다는 건 다 하게 하셨어. 또래 둘이 김향초에게 승무 배우는 것 알고 ‘나도 배우고 싶다’고 하니 어머니가 당장 승무 출 때 필요한 장삼(품과 소매가 넓고 길이가 긴 웃옷)을 만들어 주고 돈도 주면서 ‘가서 배워라’ 하시더라고. 다른 사람들은 ‘부모가 말려서 못 했다’, ‘부모한테서 도망 나왔다’고도 하는데 우리 어머니한테 감사하지. 김향초가 춤뿐 아니라 가야금과 기타, 노래도 잘했는데 가야금을 하고 싶더라고. 그래서 (중학생 때) 풍류객 이덕열에게 가야금과 단소, 양금, 풍류를 배웠고, (고등학생 때) 이운조(가야금·거문고 명인)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웠지.”

 

―그런데 이화여대 사회학과로 진학한 이유는 뭡니까.

“당시(1958년) 가고 싶었던 대학에 국악과가 없어서 그랬지. 가야금을 계속 배우고 싶어 운현궁에서 가야금을 가르치던 김윤덕 선생(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을 찾아가 가야금산조와 거문고를 배웠고, 한일섭 문하에서 아쟁을 배우기도 했지. 그러다 대학 4학년 때 김윤덕 선생 제자 중 하나가 자기 마음대로 전국신인방송국악경연대회에 내 이름으로 지원서를 냈더라고. 내가 아쟁으로 1위 장관상을 받았는데 참 운이 좋았어. 대금으로 참가한 편재준이란 어른과 붙었는데, 감히 실력을 댈 수 없는 분이셨지. 그런데 눈이 안 보이는 그분이 대금 불다 잘못 만져서 소리가 안 나는 바람에 내가 1등 했어. (계속) 이 길을 걷게끔 하늘이 인도해 준 것 같아.”

―국악예술학교 교사도 하셨던데.

“당시 콩쿠르 심사를 맡았던 국악예술학교(1960년 5월 개교) 박헌봉 초대 교장이 권유해 대학 졸업하고 1962년 바로 취업했어. 학교에 부임하니 국악계 유명한 사람들은 다 거기 계시더라고. 판소리 김소희·박녹주·박초월, 가야금 성금연·박귀희, 거문고 신쾌동, 민요 이창배, 시조 홍원기, 무용 한영숙 등 50명 정도 됐나. 방과 후에 그 어른들한테 찾아가 다양한 악기와 소리, 무용을 배웠어. 학생들한테는 가야금과 아쟁에다 국어까지 가르쳤어. 문·이과 교사가 부족하니 대학 졸업한 나에게 국어 교사를 맡긴 거지. 암튼 그런 대단한 분들 속에 살면서 용광로 같은 시간을 보내며 (나도) 익지 않았나 싶어. 학생들도 만능 인재가 될 수밖에 없었고. 학년당 한 반밖에 없었는데 학생보다 더 많은 당대 최고 (국악 분야) 명인들에게서 교육을 받았으니까.”

이 명인은 1980년까지 20년 가까이 당대 명인 선생님들과 함께 보낸 국악예술학교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을 거라고 회고한다.

―가야금과 거문고, 아쟁, 양금 등 악기와 춤, 소리를 다양하게 배웠는데 결국 가야금에 전념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가장 먼저 시작하고 오래 한 것이 가야금이어서 그랬을 뿐이야. 김윤덕류 가야금산조를 하게 된 것도 김윤덕 선생에게 먼저 배운 영향이 커. 아마 성금연 선생을 먼저 만났으면 성금연류 가야금산조를 했을 거야.”(웃음)

가야금산조는 명인마다 고유한 가락을 만들고 제자들에게 전승하면서 유파(流派)를 형성했다. 현재 강태홍·김병호·김윤덕·김죽파·서공철·성금연·최옥삼·황병기류 등이 많이 연주되고 있다. 김윤덕(1918∼1978)의 뒤를 잇기로 결심한 이 명인은 1982년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후보 인정에 이어 9년 뒤 53세로 보유자가 된다.

―한국국악협회 이사장도 오래 맡으셨어요.

“당시 예술인 중에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드물었는데 박귀희, 김초희 선생 등 이사들이 대학 나온 나를 적임자로 지목하고 국악계 여론을 조성해 자연스레 맡게 됐지. 2000년부터 4년씩 3연임 해서 12년간. 국악 전공자들을 초·중학교에 시간강사로 파견하는 ‘강사풀’ 제도를 도입하고 여기저기 도움을 요청해 해외 입양인 대상 국악 교육사업도 펼쳤어.”

―후학 양성과 국악 알리기를 위해서라면 사재도 아끼지 않으신다고.

“2018년에 김윤덕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큰 행사를 하려고 했는데 한 1억원은 들 것 같더라고. 일회성 행사에 그 돈을 없애는 것보다 그분을 기릴 수 있는 게 뭘지 고민하다 (그해부터) 김윤덕류 가야금산조 전공으로 대학 입학한 아이들한테 1년 등록금을 대줬어. 성남과 용인 지역 초등학교 중 가야금 교육을 희망하는 학교 3∼4곳을 선정해 강사료도 지원하고, 가야금이 없는 학교에는 직접 악기를 사서 무료로 빌려주기도 하지.”

―200억원대 집과 토지까지 내놓으셨는데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형문화재 전수회관(교육관)이 서울 삼성동에 하나 있는데 단체 종목·기능 부문 보유자들이 주로 사용해. (음악과 무용 등) 예능 부문 보유자들은 전승교육을 할 공간이 마땅한 데가 없어 집에서 가르치기도 하는데 (소음과 이웃 민원 등 탓에) 여의치가 않아. 그래서 이 집을 헐고 개인 종목·예능 부문 보유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전수관을 지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부했지. 나를 위해 돈 쓰는 건 아깝지만 이런 일에 쓰려고 아껴 모은 거라 전혀 아깝지 않아. 더 이상 여한이 없네.”

문화재청은 이 명인이 기부한 토지에 문화재보호기금 약 200억원을 투입해 연면적 8246㎡ 규모의 예능전수교육관을 지을 계획이다. 완공 예상 시점은 2027년이다.

 

이영희 명인은… ●1938년 군산 출생 ●군산공립여고(현 군산여고)·이화여대 사회학과 졸업 ●1961년 전국신인방송국악경연대회 기악부 1등(공보부장관상) 수상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기념 해외공연 및 대통령 표창 수상 ●1982년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후보 인정 ●1991년 김윤덕류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2000∼201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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