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무슨 과학을” 편견 맞서
세계 최초 후천적 면역체계 규명
암·유전병 치료기술 혁신 공헌
코로나 진단·백신 개발에도 쓰여
“위대한 발견, 인류 협업 필요해”

코드 브레이커/월터 아이작슨/조은영 옮김/웅진지식하우스/2만4000원
“올해의 상은 생명의 코드를 다시 쓰는 것에 돌아갔습니다. 이 유전자 가위를 통해 생명과학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2020년 12월,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여성 과학자 두 명이 선정되면서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미국의 제니퍼 다우드나(사진)와 프랑스의 에마뉘엘 샤르팡티에가 그 주인공으로, 여성이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는 노벨상 100여 년 역사에서 여섯 번째였다.
미생물학자인 이들은 2012년 박테리아가 바이러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후천적 면역체계인 크리스퍼(CRISPR) 시스템을 세계 최초로 규명해냈다. 이 시스템은 유전자 편집 기술(크리스퍼 가위)로 발전해 암과 유전병 치료에 크게 기여해 왔다.
전기 작가 월터 아이작슨이 펴낸 ‘코드 브레이커’는 생명의 비밀을 좇는 제니퍼 다우드나의 성장기와 크리스퍼 가위의 발전사를 상세히 들려준다. 저자는 애플의 공동 창업주 스티브 잡스의 공식 전기 ‘스티브 잡스’를 그가 타계한 지 19일 만인 2011년 11월에 펴내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2012년에 다우드나를 비롯한 과학자들이 개발한 유전자 편집 도구는 10억 년 이상 바이러스와 싸워 온 박테리아의 바이러스 퇴치 기술에 바탕을 뒀다. 박테리아는 제 DNA에 새겨 넣은 크리스퍼라는 반복된 염기 서열을 이용해 과거 자신을 공격했던 바이러스를 기억했다가 재침입하면 즉시 파괴할 수 있다.”
저자는 새로운 바이러스와 싸우도록 스스로 개조하는 면역체계야말로 반복적인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고통받는 현대 인류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실제 크리스퍼 가위는 지구촌에 엄습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백신 개발과 진단·치료 연구에도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오늘날 모더나·화이자 백신은 이 같은 연구와 생명과학자들의 공조 덕분에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1년여 만에 탄생할 수 있었다. 또 바이러스를 진단하는 가정용 키트, 바이러스 유전자를 파괴해 그 활동을 억제하는 치료제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코로나19와의 전쟁은 기존 규칙에 따라 진행되지 않았다. 다우드나와 장펑의 지휘하에 대부분 학교 연구소들은 자신들의 발견을 바이러스와 싸우는 모두와 공유했고, 이는 연구자들 간에, 심지어 국가 간에 더 큰 협업을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전 세계 과학자들이 코로나바이러스 염기 서열의 오픈 데이터베이스에 기여해 2020년 8월 말까지 3만6000건이 입력됐다. 다우드나가 베이 에어리어에 있는 랩들을 한데 모아 만든 컨소시엄만 봐도, 만일 이들이 지식재산권 협의를 걱정해야 했다면 이렇게 빨리 뭉칠 수 없었을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2년 넘도록 전 세계를 황폐화하고 있는 가운데 협력을 바탕으로 인류 모두가 손잡고 자신감 있게 앞으로 나아가자는 다우드나의 제언은 깊은 울림을 준다.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과학자들의 협업으로 관리되는 연구 생태계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을 촉진한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 준다.
책은 또 유전자 조작이 가져올 윤리적·사회적 문제도 깊이 있게 다룬다. 도덕적 가늠자에 포함될 일련의 원칙들을 세워 무조건적 찬성과 절대적 금지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맞추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제 우리는 유전자의 미래를 좌우할 힘을 가졌습니다. 실로 대단하고 두려운 능력이지요.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힘을 존중하면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저자가 다우드나의 첫 공식 전기를 펴낸 데는 다우드나가 여성이라는 점도 고려됐다. 대부분 여성 과학자들이 그렇듯, 그녀 역시 과학자로 성공하기까지는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야 했다.
“여자가 무슨 과학을 한다고?” 어린 시절에는 업신여김을 받아야 했고, 과학자가 되고 나서도 수많은 ‘알파 수컷’ 경쟁자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연구 성과를 인정받으려 남다른 노력을 해야 했다. 다우드나가 노벨상을 수상한 뒤 기자회견에서 받은 대다수 질문은 이 상이 여성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 것들이었다. 그는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훌륭한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여성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하건 남자였다면 받았을 만큼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기분을 느끼죠. 저는 시대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이번 노벨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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