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왕의 오만함 대신 탐욕 충만한 인간상 초점
미워할 수 없는 악인들 등장… 선악 잣대 없이 그려
도덕·윤리로 모든 것 판단 못해… 물처럼 잔잔하게 세상을 보라

1998년 등단 이후 다양한 예술영역을 넘나들며 인문학적 깊이와 철학적 사유가 담긴 작품을 선보여 온 극작가 배삼식. 그간 쌓인 연륜과 통찰을 도구 삼아 그가 셰익스피어의 걸작 ‘리어왕’에서 캐낸 새로운 결정(結晶)은 ‘천지는 비인(非仁)하다’였다. 왕국을 잃고 광야를 헤매는 늙은 왕의 오만과 어리석음에 초점 맞추는 대신 도덕이란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간 군상을 선악의 잣대 없이 공평하게 보여준다.
“셰익스피어는 그렇게 단순한 작가가 아닙니다. 선악을 나누는 비극으로 ‘우리는 그러므로 착해야 한다’ 같은 얘기를 하려고 이 이야기를 썼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국립창극단 ‘리어’(사진) 공연을 앞둔 배삼식 극작가는 세계일보와 지난 23일 인터뷰에서 “(부친을 진정으로 사랑한 셋째딸) 코딜리어는 살해당하고 늙은 왕도 비참하게 죽는 ‘리어’는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이야기다. 어떤 인과응보나 권선징악도 없고 ‘이 세계는 그러해야 한다’는 기대와 정반대 방향에서 끝난다”며 이같이 말했다.
“극을 쓰면서 ‘이 세계는 우리가 원하는 것처럼 어질지 않다’는 노자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셰익스피어가 그럴듯한 따뜻한 내용이 아니라 잔혹한 세계 속 애달픈 인간 존재를 가감 없이 드러낸 건 도덕·윤리에 기대어 살 수 없는 이 세계 속 인간이 얼마나 분투하며 살려고 애쓰는지 보여주려 한 것이죠.”

대문호의 익히 알려진 고전을 ‘창극’이란 까다로운 형식에 담아내기 위해 새로 쓰다시피 한 이번 작품에서 배삼식은 삶의 비극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상선약수·上善若水)’, ‘만물을 이로이하되 다투지 말라’는 노자사상과 엮어냈다. “세계와 관계없이 떠나 살자는 ‘무위’가 아니라 이 세계를 무정함과 잔혹함이 있는 그대로 들여다봐야 한다는 이야기죠.”
특히 귀족의 서자로 태어나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었던 지위와 권세를 음모로 쟁취하는 에드먼드, 그리고 부친을 배신한 것처럼 자신도 배신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 리어왕의 큰 딸 거너릴, 둘째딸 리건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어쩌면 리어도 젊은 시절에는 에드먼드처럼 앞사람을 밀어내며 자신의 욕망을 성취한 사람이었겠죠. 에드먼드는 주도적으로 사건을 이끌어나가는 가장 강력한 인물입니다. 리어는 밀려오는 흐름에 수동적으로 저항하는 인물이죠. 리어만큼이나 에드먼드가 중요하고 미워할 수 없는 악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거너릴이나 리건도 그렇게 보이기를 원하고요.”
배삼식은 “리어만큼이나 중요한 또 하나의 힘이 그 뒷세대 이야기다. 에드먼드와 리건 등이 보여주는 세계가 거울처럼 짝이 되어 리어가 소멸을 향해 가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간관계 갈등으로 인해 사건이 벌어지는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과 달리 ‘리어’는 사회와 인생 전반의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언제까지 늙은이들의 폭정을 참고 견딜 것이냐. 늙은이들이 틀어쥐고 있는 것은 본디 우리 것이다”, “개새끼가 감투 쓰고 사람을 매질하고 큰 도둑 재판관이 좀도둑을 호령한다. 누더기 사이로는 작은 죄도 훤하지만 감투 쓰고 돈 칠하면 모든 죄가 얼렁뚱땅” 등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세태를 향한 셰익스피어의 날 선 풍자가 고스란히 살아 있다.
여기에 배삼식은 도덕 과잉을 경계하는 노자의 목소리도 더했다. “요즘 제가 느끼는 건 ‘도덕의 과잉’이랄까요. 그게 분열적으로 ‘욕망의 과잉’ 상태와 함께 갑니다. 밑바닥은 누구나 욕망으로 들끓으면서 서로 과잉된 도덕으로 공격하고, 비인간화하고, 심지어 공동체에서 삭제하거나 추방하죠. 도덕, 인·의·예·지로 인간 삶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그런 생각이 사람을 억압한다는 걸 노자가 지적했다고 생각해요.”
‘거트루드(2008)’, ‘템페스트(2009)’, ‘햄릿(2016)’ 등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을 새롭게 무대에 올려 온 배삼식에겐 이번 ‘리어’도 2007년 공연에 이은 두 번째 만남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리어를 보는 눈도 달라졌는지를 묻자, 그는 “지금보다 젊었을 땐 ‘맥베스나 햄릿에 비하면 (리어왕이) 극적 긴장감이 떨어지는 거 아닌가. 뻔한 거 아닌가’라며 셰익스피어도 나이 먹고 노인네 같은 소리를 했다고 생각했다. 뭔가 깊으나 극적으로는 느슨하다고 여겼다”며 “지금 와서 보니 맥베스처럼 이야기의 힘으로 긴장감 있게 끌고 나가면 놓치기 쉬운 부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느슨해 보이는 구조가 필요했던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건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는 이야기에서 벗어나 외양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어보도록 훨씬 더 멀리까지 이야기를 밀고 나간 점이죠.”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어떤 그릇에도 담길 수 있으며, 때로는 잔잔하고 때로는 거센 성질을 지닌 물은 ‘리어’ 실제 공연에서도 20톤가량이 동원돼 무대를 채울 예정이다. 여러 장면 중에서도 배삼식은 “원작에선 전령이 뛰어들어와 전황을 보고하는데, 이번엔 강 여울 위에서 뒤엉켜 싸우는 마지막 전투가 어떤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낼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내심 바라는 건 이 작품을 보면서 모두가 좀 더 너그러운 마음이 됐으면 합니다. 서로 들끓으며 서로 싸우고 어떤 선악도 없는 욕망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산골짜기에서 졸졸 흘러가 바다에서 잠잠해진 후 안개가 되고 구름이 되어 다시 비로 돌아오는 물처럼요. 도덕·윤리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거나 ‘일도양단’으로 모든 걸 나눌 수 있는 칼날이 결코 아니라는 생각을 한 번쯤 했으면 합니다.” 국립창극단 ‘리어’,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3월 17일부터 2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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