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4년 10월 서울이 조선왕조의 수도로 결정된 데는 동서남북으로 네 곳 산이 있다는 것이 큰 역할을 하였다. 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이 도심을 감싸 자리하고, 이들 산을 연결하는 한양도성을 쌓았다. 국방의 안전을 꾀하고 도성의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각 산의 정상에는 봉수대(烽燧臺)를 설치했다. 봉수대는 ‘봉화(烽火)를 올리는 대’라는 뜻이다.
봉화는 전통 시대 변방으로부터의 위급한 상황을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을 피워 신호를 전달하는 통신, 정보 시스템이었다. 다섯 개의 대에서는 평상시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국경 가까운 곳에 나타나면 3개, 적이 국경을 쳐들어오면 4개, 적과의 교전이 벌어지면 5개의 횃불을 올렸다. 조선시대까지는 전국에 봉수제도가 운영되고 있었다. 국경이나 해안 지역 높은 산을 거쳐 서울로 봉화를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제1 봉수대는 함경도와 강원도를 거쳐 양주 아차산에, 제2 봉수대는 경상도에서 충청도를 거쳐 경기도 광주 천림산에, 제3 봉수대는 평안도 강계에서 황해도를 거쳐 한양의 무악 동봉에, 제4 봉수대는 평안도 의주에서 황해도 해안을 거쳐 한양의 무악 서봉에, 제5 봉수대는 전라도에서 충청도를 거쳐 양천 개화산을 거쳐 마지막으로 남산 봉수대로 이어졌다.
봉수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이 단행되면서 1895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1930년대까지도 남산의 5개 봉수대 자리는 산 정상에 남아 있었지만,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거의 사라졌다.
이후 남산 5개의 봉수대 중 1개의 봉수대 복원 사업이 이루어졌고, 1993년 9월 20일 마침내 서울시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공식적인 명칭은 ‘목멱산봉수대(木覓山烽燧臺)터’다. 정조가 건립한 화성(華城)에 위치한 봉돈(熢墩)도 유사한 형태이다. 남산 봉수대는 남산의 대표적 상징물인 남산타워 바로 옆에 위치하여, 남산의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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