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뜻한 물 나오는 화장실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서울역 인근 동자동에서 1평 남짓한 쪽방에 사는 서모(55)씨 집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 지난 겨울 공동으로 사용하는 샤워실 겸 세탁실에 있는 순간온수기가 고장 났기 때문이다. 집주인이 ‘금방 고쳐주겠다’는 말만 반복하는 사이 어느새 겨울도 끝나가고 있다. 24일 찾은 샤워실은 한기가 돌아 야외에 서있는 것과 별반 다를바 없었다. 고무대야 가장자리에 고드름까지 맺혀 있는 모습이었다. 공용 화장실의 변기마저 물이 얼어 서씨 등 세입자들은 겨울 내내 인근 공원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다.
서씨에게 1년 전 정부가 발표한 동자동 쪽방촌 정비계획은 희망 고문이 되고 있다. ‘쪽방촌 주민에게도 1000호가 넘는 공공임대 주택이 공급된다’는 소식에 ‘화장실 있는 집’에 살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었지만, 집주인 등의 반대에 부딪혀 사업이 표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이날 둘러본 동자동 일대에는 공공개발에 반대한다는 현수막과 건물 소유주 등이 꽂은 빨간 깃발이 동네 곳곳에 내걸려 있었다. 서씨는 “집주인은 개발을 앞두고 있어서 돈을 들여 집을 고쳐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되든 여기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는 사업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국내 최대 규모인 동자동 쪽방촌의 공공개발 사업 추진이 1년 넘게 미뤄지면서 주민들의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열악한 환경에 놓인 쪽방촌 거주자들은 정부에 조속한 개발 추진을 촉구했다.
이날 국토교통부 등에 따르면 지난해 2월 발표된 ‘서울역 쪽방촌 주거환경 개선을 위한 공공주택 및 도시재생사업’(쪽방촌 정비계획)은 지구지정이 미뤄지며 표류하고 있다. 지구지정 고시는 개발구역을 정하는 일로 택지개발 사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일이지만, 계획 발표 이후 1년 넘게 진척이 없는 것이다. 당시 국토부와 서울시 용산구 등은 동자동 일대 4만7000㎡ 규모의 쪽방촌에 주택 2410채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엔 쪽방 주민 등 기존 주민의 재정착을 위한 공공주택 1450호(임대주택 1250호, 분양주택 200호)와 민간분양주택 960호 등이 포함됐다.

사업에 속도가 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쪽방촌 ‘집주인’들이 민간개발을 요구하며 공공개발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쪽방 주민들의 제대로 된 이주가 사업의 주된 목적 중 하나인데 반대 입장이 거세 민간개발을 하더라도 이주대책 등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한 대책을 검토하고 있다”며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심의 등을 통해 소유자들을 설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지난해 정부가 쪽방촌 정비계획을 발표하고 소유자 동의 요건이 없는 공공주택특별법에 따라 사업을 진행하자 소유자들은 ‘사유재산권을 침해한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쪽방촌 주민들은 민간개발이 진행될 경우 쫓겨날 수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정부가 본래 계획대로 공공주택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동자동 공공주택사업 추진주민모임, 동자동사랑방 등은 이날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토부의 지구지정을 촉구했다. 14년 전부터 동자동 쪽방촌에 살고 있다는 임성연(53)씨는 “다른 고시원에서는 여자라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는 곳이 많아 쫓겨나듯 쪽방촌에서 살게 됐다”며 “불안하지 않고 안전하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영국 동자동 공공주택추진 주민모임 위원장도 “쪽방촌에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은 열악하다 못해 비참한 처지”라며 “하루빨리 정부가 공공개발을 통해 이들 주민을 편안하게 해 달라” 고 요구했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는 “정부와 정치권은 주택 공급만 늘리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 집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며 “동자동이 소수의 이윤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지역을 일궈온 주민을 위한 공간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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