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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효환 "세계문학으로서 한국문학 위해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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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8-18 07:30:00 수정 : 2021-08-17 21: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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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효환 한국문학번역원장./2021.08.12./하상윤 기자

“제비가 한 마리 왔다고 봄이 오는 건 아니지만, 반대로 봄이 오면 제비도 오고 꽃도 피고 새들도 다 옵니다. 금메달을 한 번 땄다고 세계 1위가 되는 건 아니죠. 일상화와 구조화가 중요합니다.”

 

곽효환 한국문학번역원장은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넘어 ‘세계문학으로서 한국문학’의 길을 주장하면서 “노벨문학상은 과정일 뿐, 결코 목표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세계문학으로서 한국문학이 자리가 잡히면 자연스럽게 노벨문학상을 비롯한 세계적인 문학상도 받게 됩니다. 노벨문학상 역시 이 과정에서 지나가야 할 하나의 과정이지, 그것 자체가 목표가 되는 건 잘못이죠. 목표가 잘못 조준되고 과몰입하는 현상이 일부 있는 것 같아요. 지원기관이나 문학계 관계자들도 생각을 바꿔주는 게 좋겠습니다.”

 

곽 원장은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1990년대 김영삼 대통령이 세계화를 얘기할 때 제가 대산문화재단을 창립하며 사용한 표현으로, 중심으로 진입하고 싶다는 열망이자 나 좀 봐달라는 희망의 표현이었다”며 “30년도 지났고 우리 위상도 달려졌으니, 이젠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보통 세계문학을 말하면 어떤 기본 관념이 있는데, 맨 앞에는 셰익스피어와 괴테, 중간에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푸시킨이 있고, 제일 끝에는 헤밍웨이와 마르케스를 떠올립니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세계문학에 한국문학이 없는데, 앞으로 세계문학에 한국문학의 자리를 만들도록 하겠다는 의미죠. 번역원이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난 5월 부임한 곽 원장은 ‘북방의 시인’이라는 호칭이 붙은 중견 시인 출신이자 한국문학 연구자, 문학기획자, 예술문화 행정가라는 서너 개의 길을 걸어온,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문학계의 일꾼. 그래서 소설가 이승우는 잡지 『작가세계』에 쓴 '곽효환론'에서 ‘한 몸으로 여러 사람을 사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곽 원장을 지난 6일 서울 삼성동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실에서 만났다. 그의 말은 빨랐고, 힘이 있었다.

곽효환 한국문학번역원장./2021.08.12./하상윤 기자

―한국문학의 해외 진출을 위한 ‘한국문학 글로벌 플랫폼’을 구축하겠다고 말하셨는데, 그 의미와 현재 어떻게 구축하고 있는지.

 

“한국문학 번역출판에 대한 포털사이트를 구축하겠다는 것으로, 핵심은 1년 내내 한국문학 저작권이 상시 거래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국내 작가나 출판사가 한국문학 작품을 해외에 팔고 싶으면 일정한 양식으로 이 포털에 올리고 반대로 해외 출판사 역시 한국작품의 저작권을 사고 싶으면 포털에 들어와서 거래하는, 한국문학 작품의 저작권 거래가 1년 365일 이뤄지게 할 생각이다. 연간 한두 번 정도 오프라인 행사도 구상하고 있다. 최근 해외 출판사가 한국문학 작품을 번역 출판하겠다며 번역 지원을 신청하는 건수가 점점 늘고 있다. 2019년 97건에서 2020년 142건, 올해는 200여건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매년 17%씩 늘어나는 셈이다. 저희는 이를 긍정적이고 밝은 신호로 본다.”

 

곽 원장은 통합 플랫폼에는 이외에도 △주요 작가별, 출판사별, 작품별 한국문학 출판에 대한 아카이브 △한국문학 작품에 대한 리뷰, 논문, 인터뷰 등 실시간 스트리밍 서비스 △디지털화된 오디오와 전자책, 공공저작물의 공개 등도 담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년 하반기쯤 시제품을 보여주고, 연차가 쌓여 임기 중에는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얼마 전 인터뷰한 유익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해외에 번역 출간하고 싶어 했는데, 자신의 돈을 들여 해외에 번역 출간해야 하는지 고민하더라.

 

“그간의 번역출판 지원시스템이 주로 작가와 번역가가 서로 연결시켜 하는 방식이었는데, 앞으로 더 개방적으로 하려 한다. 우리는 많은 정보를 사이트에 올려주고 해외 출판사들이 관심과 여건에 따라 선택하는 식의 시장적 기능을 주는 게 좋겠다. 번역 출판된 책이 번역된 나라의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현지 출판사의 안목을 믿고 맡겨야 한다. 그리고 시장에서 해결되지 않는 부문이 있다면 지원기관이 적절히 참여하면 된다.”

 

―기존 번역아카데미를 번역대학원대학으로 제도화하겠다는 방안은 번역가들이 해외 현지에서 자리를 잡고 활동성을 높일 좋은 방안이지만, 예산이나 법제화 등의 어려움이 적지 않을 텐데.

 

“번역대학원대학은 한국문학뿐만 아니라 한국의 예술문화 콘텐츠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일본 근대화 역사를 번역의 역사라고도 하는데, 서구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며 철두철미한 번역을 통해 근대화 내용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21세기 신한류의 역사 역시 번역의 역사가 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행처럼 지나갈 수 있다. 현지에 뿌리내리고 거스를 수 없는 하나의 흐름이 되기 위해선 인문학이 그 중심이 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좋은 번역가가 많이 나와야 한다. 현재 번역아카데미밖에 없는데, 학원 운영하듯이 하는 건 국력의 낭비이고, 미래를 위해선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해 관계 당국이 너그럽게 수용해주기 바라지만, 1차적으로 교육부에서 인허가가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번역아카데미를 대학원대학 수준으로 끌어올릴 생각이다. 커리큘럼이나 학제, 학생 사후 관리 등을 대학원대학교 수준으로 높여놓고 인허가는 그 다음 더 큰 단위에서 논의할 수도 있다. 필요하다면 문체부에서 주는 준 석사 형태의 전문사 자격증을 주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경우도 벤치마킹할 생각이다. 아직까지는 분위기가 좋다.”

 

―현장 번역가들의 목소리는 어떤지.

 

“한국문학 번역 수준은 그 동안 어마어마하게 향상됐다. 1990년대 초반 대산문화재단에서 한국문학 번역지원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번역가가 거의 없었다. 외국어를 잘하는 한국 사람이 주로 번역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외국어를 잘한다고 해도, 모국어가 아닌 배운 나라의 언어로 번역한다는 점에서 약점이 많았다. 그래서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과 외국어를 잘하는 한국인이 팀을 이룬 공동 번역을 권장했고, 20여 년간 지속되면서 퀄리티가 많이 향상됐다. 2010년 이후에는 한국어 및 한국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사실상 네이티브인 교포 2, 3세 등이 대거 등장하면서 번역 수준이 높아지고 층이 넓어졌다. 다만 새롭게 등장한 젊은 번역가들의 가장 큰 문제는 번역아카데미 등에서 공부를 하더라도 다음 길이 넓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가 유학가면 현지에서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취직해 그걸로 먹고 산다. 하지만 현재 번역아카데미의 재학생 90%가 외국인으로, 2, 3년씩 공부하고 대부분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데, 그 다음 길이 많지 않다더라. 번역원과 대산문화재단 2곳에서 번역 지원비를 받더라도 건당 1000만~1500만원에 불과해 최저생활비도 쉽지 않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이 자기 나라나 언어권으로 돌아가 현지에서 자리를 잡고 지속적으로 한국 문학과 문화를 말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번역대학원대학을 주장하는 것도 이들이 돌아가서 자리를 잡아 안정되면 결국 한국문학 번역이나 관련 일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자리를 잡으면 죽을 때까지 한국문학을 위해 헌신 봉사할 이들이다. 최근 카카오 엔터테인먼트와 MOU를 체결했는데, 한국문학뿐만 아니라 한국어 문화예술콘텐츠를 번역할 수 있도록 번역지원 시스템도 바꾸고 새 일도 만들어 번역가들을 관리하고 도와줄 시스템을 만들려고 한다. 한국 웹툰은 경쟁력이 있지만 번역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면서 걱정이 많다고 하더라. 현지에서 엉터리로 번역하거나 잘못 번역해 일시적인 유행으로 그칠 수 있다. 좋은 번역가들이 많이 생기면 한국문학뿐만 아니라 한국어로 이뤄진 예술문화 콘텐츠의 탄탄한 기반이 될 수 있다. 번역원은 한국문학뿐만 아니라 한국어 예술문화 콘텐츠로 업무영역을 확장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노벨문학상은 과정일 뿐 결코 목표가 아니다고 했는데, 한국문학은 지금 어디에 와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긍정적인 지점을 말하면 먼저 양적으로 해외 소개가 많이 늘었다. 해외 출판사가 번역 출판하겠다며 번역원에 지원 신청하는 게 연간 200건이고, 대산문화재단까지 합치면 연간 250~300건 정도가 착수된다. 출판도 연간 100~150권이 나오는 시대가 됐다. 또 번역 출간되는 문학 작품들도 1990년대에는 이청준과 이문열, 2000년대엔 고은과 이승우, 신경숙 등이 중심이었다면 2010년 이후에는 다양해졌다. 한강의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전후로 해서 김영하, 정유정, 조남주, 편혜영, 김연수, 정세랑, 김혜순, 윤고은, 김이듬, 정세랑 등이 세계의 크고 작은 문학상을 받거나 그들의 작품이 소개되는 등 작가군이 젊어지고 다양해졌다. 다만 확실한 한방의 스타가 부재한 건 아쉽다. 번역, 출판 과정에서 지원 기관이나 출판사들이 전략적 선택과 집중을 병행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하지만 저변이 다양해졌다는 점 등은 길게 보면 한국문학의 미래를 위해선 바람직하게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번역원 지원으로 해외에서 번역, 출간된 국내 작가나 작품의 경향성이 있는가.

 

“해외 출판사나 번역가들이 번역, 출간을 가장 선호하는 국내 작가는 과거에는 고은 시인이었다면 한강 작가의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이후에는 많이 변했다. 작가군도 다양해지고 젊어졌다. 특히 정유정이나 정세랑 등은 전통적인 순문학에서 약간 빗겨나 있다는 점에서 외국에서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시선도 넓어진 것 같다. 1990년대 초반 유럽 출판사 관계자들을 만날 때 한국문학은 한국전쟁 빼고 할 얘기가 없느냐, 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을 정도로 모노톤으로 비춰졌다. 지금은 스릴러뿐만 아니라 편안한 일상의 이야기, SF 등 다양한 작품이 쏟아지니까 한국문학이 굉장히 역동적이고 다양한 문학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그는 이 대목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전해줬다. 영어와 일본어뿐만 아니라 주요국 언어로 잇따라 번역 출간되며 화제가 된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불법 해적판이 나돌 정도로 예상치 못한 중동에서의 인기,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을 놓고선 스페인의 두 출판사가 벌였던 이례적인 경쟁 등등.

―한국문학번역원이 설립 25년을 맞았는데, 성과와 과제 등을 정리한다면.

 

“되돌아보면 대견하다. 대산문화재단이 하는 영역을 공적으로 해보자고 해서 1996년 대여섯 명의 직원으로 출발했는데 25년 만에 무기 및 일반 계약직까지 합해 인력이 10배 이상 늘어나 70명 가까이 됐고, 외국인 30명이 매년 한국문학번역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있다. 성과도 컸다. 25주년 되는 지난 봄 기준으로 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출간된 번역서가 무려 1527종이다. 앞으로 번역원은 좀더 전략적 체계를 가지고 준비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지금 새로운 비전과 핵심 이념, 성과지표 등을 직원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

 

―장기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전략도 필요하겠다.

 

“지금까지는 외형적인 면에 주로 매달렸다면, 이제는 국가별 언어권별로 맞춤형 전략을 짜야 한다. 예를 들면, 아랍 지역 독자들이 추리나 SF소설을 좋아한다면 그 기호를 맞춘 작품들을 전략적으로 배치하고 이와 함께 본격문학도 같이 가야 하는데, 그 동안 그런 전략이 없었다. 해당 지역 및 나라의 전체 번역 시장의 규모나 시장 선호도, 한국문학의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맞춤형 전략으로 움직이려 한다.”

 

1967년 전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곽 원장은 1996년 『세계일보』에 '벽화 속의 고양이 3'을, 2002년 계간지『시평』에 '수락산' 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인디오 여인』(2006), 『지도에 없는 집』(2010), 『슬픔의 뼈대』(2014), 『너는』(2018) 등이 있고, 연구서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2008)과 시 해설서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2014) 등이 있다. 그 사이 애지문학상(2013), 편운문학상(2015), 유심작품상(2016), 김달진문학상(2019) 등을 수상했다.

 

―어떻게 문학의 세계, 시인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인지.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이 문학비평을 하신 분이었는데, 참 매력적이었다. 학교가 강남 8학군인 영동고여서 문예반도 없고 문학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문학이 저렇게 매력적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고교 2학년 땐 그 분이 오시더니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묻는데, 제 짝이 최인훈의 『광장』을 읽고 있다고 하니까, 선생이 급히 관심을 표하고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서, 하교 길에 『광장』을 사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문학이라는 것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생각을 했고 글 쓰는 사람에 매력을 느껴 국문과에 진학했다. 대학교 1학년 때 김수영을 만나면서 시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대학신문사 문학상에 매년 시를 응모했지만 당선되지 못하다가 4학년 때 평론 '김수영 연구-참여문학정신 중심으로'를 응모해 당선돼 문학적 인연이 시작됐다. 1996년 세계일보 지면에 시를 처음 공식 발표하고, 2002년 『시평』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시 세계를 조금 설명해 달라.

 

“첫 시집 『인디오 여인』에서 중점을 둔 것은 탈경계의 상상력이었다. 국가와 민족, 종교 등 경계를 만들고 경계 안에 가두려는 것은 20세기 산물이라고 생각했고 그 경계를 뛰어넘는 서사, 사유에 도전하려 했다. 세계 다양한 곳을 여행하면서 사유한 내용을 담았다. 두 번째 시집 『지도에 없는 집』에선 근원적 민중성에 대해 도전했다. 정치적이고 외형적인 것을 다 덜어낸 민중의 원초적인 것이 뭐가 있느냐, 그것을 파고들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시집에선 북방이 주요한 화두가 된다. 대학원 시절 공부하면서 이용악 시인을 읽었는데 뜨겁게 차올라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험을 했다. 살펴보니 이용악과 백석, 김동환은 한반도에서 사라졌던 북방이라는 공간의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두만강에서 압록강을 중심으로 하여 사는 사람들의 삶과 서사, 이들의 고난, 이들의 이야기의 기원과 사유... 박사학위 논문도 김동환 이용악 백석 등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 연구'였다. 관련 연구서도 3쇄까지 찍었다. 이런 공부를 하면서 북방이라는 것이 시적 중심으로 딸려 들어왔다.”

 

―‘북방의 시인’으로 불릴 정도로 ‘북방’에 주목했는데, 왜 북방이었는가.

 

“우리 민족은 먼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북방이라는 건 곧 기원, 시원, 사랑, 궁극의 동의어다. 우리 민족은 북방에서 여러 민족들과 섞여 살면서 때로는 강성했고 약할 때에는 협력하며 어울려 살았다. 북방은 우리만 살았던 게 아니라 여러 민족이 경쟁하고 협력하며 살았다. 고구려, 발해 시절의 북방은 우리 땅이 아니라 우리가 주도적으로 다른 민족과 조화롭게 협력하고 살면서 이뤄낸 제국이었다. 그런 면에서 북방이 주는 의미는 크다. 단일 민족으로 지배하는 게 아니라 여러 민족의 리더가 돼 협력하고 공존했다. 북방하면 고구려, 발해만 생각하고 회복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생각해보라. 우리 집 앞으로 한 사람이 울면서 찾아와 몇 십 년 전 자기 집이라며 되찾아야 한다고 말하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옛날에 내 집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북방은 고대사에선 영화로운 공간이지만, 고려, 조선 시대에는 북방에서 연고권을 잃고 내려온 시기였다. 정치적으로 빼앗겼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여전히 삶의 공간이고 살아온 공간이었다. 근대사에선 철저히 수난의 공간이었다. 많은 이들이 땅을 잃고 북방, 즉 만주나 연해주로 떠났고, 거기에서 또다른 고난이 시작됐다. 하지만 분단되면서 북방이라는 공간과 상상력을 잃어버렸다. 휴전선에 가려서 우리는 섬처럼 좁게 살고 있고 상상력마저 잃어버렸다. 일제 때만 해도 경성역은 국제역이었고, 경성역에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갈아타고 유럽 헤이그까지 갔다. 우리가 온전한 한 민족이 되기 위해선 북방에 대한 상상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서 북방을 천착하는 시를 썼다. 그건 북방에 대한 상상력을 회복하고 되돌려놓은 작업이었다. 그동안 연구가 많지 않아 과분하게 ‘북방의 시인’ 칭호를 누리는 것 같다.”

곽효환 한국문학번역원장./2021.08.12./하상윤 기자

―아이디어나 이야기를 어떻게 시로 만드는지.

 

“논문은 시간이 많은 부문을 해결해 준다. 앉아서 공부하고 읽고 정리하면 밀어내기 식으로라도 나오지만, 시는 그렇게 안된다. 시는 찾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헤매고 있을 때 문득문득 찾아와 준다. 많이 걷고 사람을 만나는 것은 시라는 그분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의례다. 저의 경우 시상이 잡히면, 단편적으로 옮기려고 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서 조사하고 생각해 입체적으로 엮으려 한다. 저에게 생각한다는 건 매우 중요하다. 시인이란 마지막까지 망설이고 주저하고 마지막까지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그가 불쑥, 꺼낸 사람이 바로 월레 소잉카였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문학관의 선회가 이뤄졌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소잉카는 ‘내 소설은 치료약이 아니라 골칫덩어리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그리고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지를 고통스럽게 질문하는 것이 문학이라는 것이다. 문학인이란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시인이란 마지막까지 망설이고 주저하고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생각한 결과를 옮기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다시 정리하게 됐다.

 

―30년 가까이 대산문화재단에서 활동했는데, 어떤 인연으로, 무슨 일을 했는가.

 

“대학을 졸업하고 연합뉴스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대학신문 3학년 때 주간 교수였던 류태영 교수의 제안으로 1992년 대산문화재단 설립준비위에 합류했다. 준비 단계부터 합류했기에 대산문화재단이 한 거의 모든 일을 다해봤다. 한국 문학에 조금 기여했다는 점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그러면서 △한국문학 번역출판 지원 사업 △‘대산문학상’ 제정 운용 △탄생 100주년 문학제 신설 운용 △동아시아문학포럼과 서울국제문학포럼 조직 및 개최 등을 설명했다. 사실상 대산문화재단의 거의 모든 활동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보람찬 것은 역시 국제 문학포럼의 조직과 개최.

 

“2000년 처음 열린 서울국제문학포럼은 국내에서 처음 열린 국제 문학포럼이었다. 배우자는 취지가 아닌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이 교류하고 대화하는 장으로 만들었다. 월레 소잉카나 피에르 부르디에, 르 클레지오, 모옌, 오에 겐자부로, 오르한 파묵 등을 만나고 교류할 수 있었다. 서울국제문학포럼을 하면서 한국문학의 인지도도 많이 올라갔다. 르 클레지오가 한국에 관한 소설을 쓰는 등 서울포럼을 다녀간 작가들은 한국 이야기를 하거나 한국을 배경으로 작품을 썼다. 오르한 파묵의 경우 터키 신문 한 면에 걸쳐 한국 이야기를 썼다. 동아시아문학포럼의 경우 김우창과 오에 겐자부로가 대담에서 한중일이 역사와 영토 문제 등으로 갈등할 때 문학인들이 이것을 뛰어넘어 공동의 비전을 찾아보면 좋겠다고 해서 그것을 받아서 중국의 모옌을 만나 성사시켰다. 세 나라가 교대로 개최하고 비용은 삼분하는 등 문학교류의 전범을 세웠다. 세계 작가들의 사유에 한국과 한국인들이 들어가고 반대로 한국 작가들 역시 시야와 상상력이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서울국제문학포럼이나 동아시아문학포럼은 한국문학의 세계화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대산문화재단의 활동을 든든하게 지원한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은 그에게 단순히 월급을 주던 사람이 아닌, 청년기부터 문학기획자이자 문화예술 행정가의 롤 모델을 제시해준 고마운 분이었다, 대학신문 주간이었던 조남현 교수와 문학평론가 유종호 교수, 지도교수이자 시인인 최동호 교수 세 명의 은사와 같은 급의. 기자가 대담 끝자락에 ‘신 회장께서 번역원장으로 간다고 하니까 좋아하고 격려해 주지 않았느냐’고 지나가며 물었는데, 그는 손사래를 치면서 “아니다, 무척 아쉬워했다”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회사가 어려운 상황에서 오랫동안 가까이에 있던 사람이 자리를 옮기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그러니까, 당신도 처음에는 네가 선택해라, 중간에는 남아주면 좋겠다, 마지막에는 가라 응원 하마, 이런 과정이 있었지요.”

 

보따리 속의 이야기 하나. 어떤 사람이 대산문화재단은 왜 문학을 (지원)하느냐, 미술이나 음악을 하면 생색이 날 것이고, 탁아소나 병원을 하게 되면 돈도 벌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묻자, 신 회장은 그건 비즈니스의 연장이지 무슨 공익사업이냐, 공익사업이란 공공적으로 필요하지만 손이 가지 못한 부문에 대해 역할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문학을 하면 빨리 표가 나지 않는다는 말에는 문화예술 지원의 핵심은 인내심에 있다고 말했다는.

 

“청년기에 신 회장을 만나서 30년 가까이 함께 일했다. 제가 문학 기획자, 문화예술 행정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신 회장의 영향이나 그분이 보여준 모습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번역원에서 비전을 만드는 것도 다 신 회장에게 배운 것이다.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될 것 같다.”

특히 신 회장에게서 공공성의 원칙을 배웠다고, 그는 『2019년 제30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시집』에서 적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투명한 과정과 합의, 미래비전 등 공익사업에 대한 식견과 의지, 전문성에 대한 존중, 타자에 대한 신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균형 잡힌 태도 등을 신 이사장과 일하며 배웠다.”(210쪽)

 

―시인과 연구자, 문학 기획자, 문화예술 행정가 등 서너 가지 길을 걸어온 것 같다. 미래의 모습은 어떨 것 같은지.

 

“번역원장으로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좋은 시인으로의 모습도 게을리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지금 너무 일이 많고 지쳐서 5개월째 시 한 편을 쓰지 못했다. 숨도 돌리지 못하고 있는데, 얘기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제 계획은 늦가을부터 시를 다시 발표하고, 시집도 늦지 않게 펴내고 싶다. 분명한 자기 색깔을 가진 시인이 되고 싶다.”

 

백석과 이용악의 다음 자리에 서 있고자 하는 시인이자 한국문학 연구자, 문학 기획자, 문화예술 행정가라는 서너 개의 길을 걸어온 곽 원장. 저녁이 미쳐 다 오기 전 사이의 시간 어느 대지 위를 무작정 걷다가 좋은 생각에 덜퍼덕 주저앉아 메모하고 있는 그를 만날지도, 아니면 어느 선술집에서 막걸리 잔을 들고서 개인의 서사가 핍진하게 담긴 소문자 히스토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그를 볼지도, 북방적 상상력을 꿈꾸며 서사와 서정의 조화를 찾아 나선 그를.

 

“그림자는 조금씩 길어지고/ 그리움은 조금씩 짙어지는/ 더 이상 낮은 아니고 아직 밤도 아닌/ 사이의 시간/ 골목 가득 재잘거리는 아이들 소리 잦아들고/ 새들도 일제히 솟구쳐 하늘 높이 날았다가/ 다시금 제 자리를 찾아 내려앉는/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오는 시간/ 너는 멀리 말이 없고 나는/ 그 시간과 거리를 헤아린다/ 인적 끊긴 비포장도로에 붉은빛 비껴들고/ 털털거리며 떠난 것들이 남긴 뽀얀 먼지 속에/ 키 큰 느티나무 한 그루 우두커니 서 있다”('해 질 무렵' 전문)


김용출 선임기자, 사진 하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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