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무너진 ‘아프간의 비극’ 남의 일 아냐
간첩을 간첩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 조선시대 홍길동전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충북 청주 노동단체 활동가 4명이 연루된 간첩단 사건의 전모가 각종 증거와 함께 밝혀지고 있으나 물타기 공작이 극성이다. 일부 세력과 동조 단체들은 방송에 출현해 이들의 행태를 두둔하고 간첩활동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고 희극화시킴으로써 북한과의 연계를 차단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김정은 정권에 대한 각종 충성맹세 서약이 드러났는데도 입을 닫고 있다. 이들의 행태는 명백한 이적행위이지만 “100% 조작” 운운하며 발뺌과 부인으로 국정원과 경찰의 수사행위를 폄하하고 일부에서는 법정에서 진실 운운하며 적반하장의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청주 간첩단 사건이 주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한민국에서 간첩 활동이 레드라인을 넘어섰다는 점이다. 지역사회에 확산된 ‘토착간첩’들이 북한의 지령으로 장기간에 걸쳐 공개적이고 합법적으로 간첩활동을 수행함으로써 우리 사회 저변에 확산된 친북 활동이 이미 국기(國基)를 흔드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을 시사한다. 과거 지하에서 암약하던 시절과 달리 청주 간첩들은 그럴듯한 신분을 내세워 공개 활동을 함으로써 외부의 의심을 일소하는 데 주력했다.
둘째, 남북관계의 흐름을 역이용했다는 사실이다.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통전부)는 썰물과 밀물 전략으로 남북관계가 훈풍이 불 때 친북 공작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 약화되고 민족공조를 강조하기에 양호한 시절이 간첩활동에는 최적이었다. 북한은 2018년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 간에 유화 국면이 조성되는 시기에 대외적으로는 한반도 비핵화와 상호 적대행위 금지를 선전했으나 물밑에서는 남한 사회의 혼란을 획책했다. 남북관계가 진전돼도 통일전선전술에 의한 남한 내부의 혼란과 적화통일 달성이라는 북한의 본질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셋째, 간첩들의 공작이 과거보다 수법이 첨단화되고 목표도 보다 구체적이고 대담화됐다. 국내 선거 개입은 물론 미국과 북한 간의 정상회담 전후로는 반미 활동 등 국내외로 다양화됐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간첩 불감증에 따른 대책 미흡이다. 국민들의 안보불감증이 심화되고, 대북 경각심은 날이 갈수록 이완됐다. 하지만 남북관계 개선에만 주력하다보니 간첩을 색출해야 하는 국정원과 경찰의 업무 추진 동력이 급격히 상실됐다. 수많은 물증을 확보해도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니 단죄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지난해 6월 정부는 북한이 400억원의 우리 예산이 투입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해도 그저 바라만 보았다. 13개월 만에 남북 통신연락선을 복원하는 데 감읍해 당국자들이 흥분하는 데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압박한 김여정의 말 한마디에 국론이 분열되고, 중국까지 훈련 중단이라는 내정간섭을 해도 청와대는 묵묵부답이다.
자강불식(自强不息)의 교훈을 새겨야 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프간의 미군 철군에 대해 “스스로를 지킬 의지가 없는 나라를 위해 미군이 피를 흘릴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남의 일이 아니다. 자신의 안보를 자신이 지킬 의사가 없다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내 나라는 내가 수호해야 하고 동맹은 부차적이다. 자국의 안보를 외국에 의지하는 것은 풍랑에 휩쓸리는 돛단배의 운명과 같다. 과거 남베트남이나 2021년 아프간이나 적과 내통하는 간첩들의 이적행위는 나라가 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단단한 제방도 작은 틈새로 무너진다. 청주에서 시작된 간첩활동이 전국으로 확대될 경우 종착지는 명약관화하다.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접수하듯이 평양이 서울을 접수하는 시나리오가 결코 어불성설이 아닐 수 있다. 1975년 남베트남 패망에 이어 아프간 함락은 우리에게 많은 안보상의 과제를 던져 주었다. 청주 간첩단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고 단죄해야 하는 이유가 나라 밖 지구 서쪽에서 들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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