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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선물 올 때마다 부부싸움 시인이면서 시집도 못 낸다고… 이제는 시가 저절로 흘러나와” [나의 삶 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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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8-14 08:00:00 수정 : 2021-08-13 21: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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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30년 만에 첫 시집 낸 시인 김용만

1987년 계간지 실천문학에 시 발표
구로노동자문학회서 본격 문학공부
결혼 후 작은 공장서 30년간 용접일

5년 전 위암 판정 받고 시골로 내려와
항암 치료와 함께 꾸준하게 일기 써
첫 시집 내자 시 부문서 ‘베스트셀러’

큰형인 시인 김용택의 영향 많이 받아
출간 후 통화… “너 참 대단한 사람이다”
“건강 회복… 정상인보다 밥 더 잘 먹어”

퇴직을 하루 앞둔 2016년 12월 24일, 야구장의 철망 보수작업을 위해 높은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던 그의 휴대전화 수신음이 길게 울려 퍼졌다. 발신처는 회사일로 바빠서 며칠 전에야 겨우 건강검진을 받았던 병원. “선생님, 아무래도 위암 같습니다. 병원에 오셔야겠어요.”

병원에서 정밀진단을 한 결과 위암으로 판정이 났다. 3시간여 수술을 받은 뒤 항암치료에 돌입했다. 이듬해 봄, 항암치료 중이던 그는 완주군 수만리 위봉산 자락 밑에 위치한, 여동생의 소개로 1년 전 나무가 좋아 샀던 시골집으로 혼자 들어왔다. 짐 하나 없이 빈 몸으로.

병원 외래를 하며 치료를 꾸준히 이어가는 한편, 그는 몸도 열심히 움직였다. 호미로 밭을 파고, 채소를 심고, 돌을 날라 집 뒤에 담을 쌓고, 꽃을 가꾸고…. 일이 힘들 때는 페이스북에 글과 사진을 올렸다. 어느새 건강을 회복했고, 힘든 항암치료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지금은 정상인보다 밥을 더 잘 먹는다고.

“평생 그리던 시골집 하나 사놓고/ 덜컥 아팠다/ 속살이 타버린 줄도 모르고/ 하루를 못 버티고 다들 떠난/ 마찌꼬바 용접사로 삼십여 년 살았다/…첫닭이 울면 어둑어둑 비질을 하고/ 동네 한 바퀴 돌아야지/ 뚝뚝 지는 능소화 꽃잎을/ 아침마다 주워야지/ 잉그락불 같은 채송화를 마당 가득 심어야지”(‘귀향’ 부문)

오랫동안 마찌꼬바 용접사로 일하고 4년 전 완주 위봉산 자락으로 귀향한 김용만 시인이 최근 등단 30여년 만에 생애 첫 시집을 펴내 화제가 되고 있다. 시인은 매일 하루에 두 번 이상 개 ‘소양이’를 위해 마을이나 앞산 등을 산책한다고 한다.

작은 영세 공장, 이른바 ‘마찌꼬바’ 용접사로 30년 넘게 일하다가 귀향해 생애 첫 시집 ‘새들은 날기 위해 울음마저 버린다’(삶창)를 펴냈다. 등단 30여년 만이었다. 노동자 시모임 ‘일과 시’ 동인으로 활동한, 유명한 김용택 시인의 동생이기도 한 김용만 시인. 그의 첫 시집은 주요 서점에서 시 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시인과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큰 화제를 낳았다. 시인 김용만에게 도대체 30년 만의 첫 시집은 무엇이었을까.

김 시인을 만나기 위해 지난 9일 일찍 완주로 향했다. 전주역으로 마중 나온 그의 차를 타고 20여분을 달려 위봉산 자락에 걸친 그의 집에 닿았다. 인터뷰 내내 강아지 ‘소양이’가 그의 품을 자주 파고들었다.

그의 시집에는 시골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벼와 배추, 담장이풀, 밥풀, 코딱지나물 등 많은 식물이 대지 곳곳을 수놓고 두꺼비나 개구리, 고라니, 멧돼지, 달팽이, 딱새 등 동물들도 자주 출몰한다.

“우리 집 두꺼비가 죽었다/ 아무리 느려도/ 도로 건널 때는/ 좀 서둘러라/ 신신당부했는데/ 아이고 속 터져/ 차에 치여 죽었다/ 오늘 인간인 내가/ 종일 미웠다/ 나는 아니라고들 하지 말라”(‘두꺼비’ 전문)

―시 마지막의 ‘나는 아니라고들 하지 말라’는 구절에서 뜨끔했다.

“전봇대의 가로등이 켜지면 두꺼비들이 전봇대 밑에 나오곤 했다. 전봇대 주위를 빙빙 돌다가 떨어지는 날파리를 주워 먹기 위해서다. 차에 치일까 봐 두꺼비를 몇 번이나 안전한 곳에 옮겨주곤 했다. 어느 날 아침 산책을 나가려다가 내장이 터져 죽어 있는 두꺼비를 발견하고, 속이 얼마나 아프던지…죽은 두꺼비를 능소화 밑에 묻어줬다.”

사람들 역시 정겹기 그지없다. 거의 매일 만난다는 학동마을 옛 이장. 타고 온 자전거를 논 가상에 삐딱하게 세우고 논을 살피면서 툭툭 건네거나 받는 그의 말을 타고 깨달음과 함께 행복도 밀려오는데.

“학동마을 구 이장님/ 장마철에도 또랑에/ 물이 없다며 마른장마라며/ 논 가상에 자전차를 삐딱하게 세운다// 온종일/ 천둥소리 자갈자갈/ 돌 구르듯 끓어도/ 찔끔찔끔 애간장을 녹인다// 난 하느님이 알아서/ 하는 일이라/ 암 소리 안하지만/ 낼 아침 구 이장님에게/ 하느님은 틀림없이 또 한소리 듣겠다”(‘하느님도 혼나야지’ 전문)

―학동마을 구 이장님을 자주 만나나.

“거의 매일 만나 대화한다. 어제도 고추에 병충해가 없네요, 라고 하니까, 병충해는 없는데 고추가 많이 열리지 않아 작년보다 수확이 못하다고 하더라. 옥수수 씨를 보며 우리 것은 적어요, 라고 하니까, 농협에서 새 씨를 받으면 크게 잘 자라는데 시장에서 사서 심어서 그렇다고 말해주더라. 이런 이야기를 매일 한다. 배우기도 하는데, 대화하면 행복해진다.”

시인 김용만은 1956년 전북 임실 덕치마을에서 ‘지게였던 아버지’와 ‘호미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4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매와 욕이 난무하던 시절, 아버지는 자식들을 때리지 않고 묵묵히 성실하게 일만 했다, 마치 지게처럼.

“난 아버지의 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지게를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아버지는 늘 진한 갈색 물이 얼룩진 옷을 입고 다니셨는데/ 옷마다 풀물이 들었기 때문이다”(‘풀씨’ 부문)

‘양글이’라고 불린 어머니는 야무졌다. 체구는 작았지만 입담도 좋았다. 식구들은 엄마를 닮아 유머가 좋고 입담이 좋았다.

전주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1987년 계간지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어떻게 문학의 숲에 들어온 건가.

“아무래도 큰 형(김용택 시인)의 영향이 컸다. 형은 독학을 했는데, 공부를 엄청나게 했다. 방에 들어가면 항상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다. 1985년 형의 첫 시집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가슴이 뜨거워졌다. 학교 다니면서도 문학 쪽에 관심이 있어서, 글을 써 신문사에도 내보기도 했다.”

―‘구로노동자문학회’와 노동자 시모임인 ‘일과 시’ 동인으로 활동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1985, 6년쯤 서울로 올라와 고향 형들을 따라다니며 아파트 현장 등 각종 일을 했다. 이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고, 구로노동자문학회를 만나며 본격적으로 문학 공부를 했다. 송경동, 황규관, 조기조 시인 등이 당시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이다. 가난했지만 모여 공부하고 술을 먹었다.”

35세이던 1990년, 그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고 아내 따라 부산으로 내려갔다(‘부산으로 시집을 갔다’고, 그는 표현했다). 부산으로 내려갔지만 그는 쉬이 직장을 잡지 못했다. 직업소개소를 찾았지만, 다소 엉뚱한 일을 소개받았다. 무슨 일을 할까, 하고 고민하면서 서면 근처를 걷고 있을 때 길가에 조그만 공장이 보이는 것 아닌가. 노동자 4, 5명이 쇳가루가 자욱한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저, 일 좀 하고 싶은데요.”

“어서 오세요, 내일부터 당장 일하러 오세요.”

곧바로 취직한 곳은 노동자 대여섯 명이 일하는 작은 공장, ‘마찌꼬바’이었다. 당시는 활황으로 매일 일손을 구할 때였다. 첫 월급으로 24만원 정도를 받은 그는 이후 30여년 동안 마찌꼬바에서 일했다.

―부산에서 무슨 일을 한 것인가.

“부산 서면 바로 옆에 위치한 마찌꼬바였는데, 용접을 해서 간판을 만들고 밤에 설치하는 간판 일을 중심으로 여러 일을 했다.(왜 용접사가 됐는지) 용접을 많이 했다. 처음에는 하나도 못했지만 데모도 하면서 하나씩 배워갔다. 일해 보니 너무 재미있었다. 작업복을 입고 가장 먼저 가서 문을 열고 청소했다. 나중에 공장이 커지고 직원들이 많이 늘어난 뒤에는 공장장이 됐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을 누비며 일했다. 회사가 잘돼서 한 달에 100시간 넘게 야간작업을 했다. 30년 넘게 그렇게 일했다.”

아내는 그가 하는 일에 ‘태클’을 걸지 않았지만, 시인이면서도 시집을 내지 못한 것에는 늘 안타까워했다. 매일 이른 새벽 출근과 늦은 밤 귀가, 시멘트 바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뒹구는 노동, 시커먼 작업복…. 동료 시인들로부터 시집을 받으면 부부 싸움을 하곤 했다고, 그는 당시 시에 그렸다.

“내 아내 맨날 뭐라 한다/ 오십이 넘어도 시집 하나 내지 못하고/ 남의 글이나 읽고 산다고// 시인들아/ 우리 집에 책 보내지 마라/ 부부 쌈 난다”(‘못난 시인’ 전문)

마찌꼬바 노동자였던 그가 완주 위봉산 자락으로 귀향해 건강도 회복하고 등단 30여년 만에 첫 시집을 펴낸 것이다. “텃논 모가 뿌리를 잘 내렸다. 저 가지런한 가난이 내가 꿈꾸는 시다”는 ‘시인의 말’처럼, 그의 시는 짧으면서도, 시상이 분명하며, 구체적이다. 시는 새벽 산과 들을 감싼 안개에서 몰려오기도 했고, 꽃이나 풀로 올라오기도 했으며, 눈으로 내리기도 했으니.

“눈 온다/ 정말 시처럼 온다/ 뭘 빼고/ 더 보탤 것도 없다// 넌 쓰고/ 난 전율한다// 시는 그런 것이다”(‘폭설’ 전문)

인터뷰 내내 이제 대시인이 된 큰형 김용택 얘기는 조심스러워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자칫 큰형에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했다. 김용택 시인과 관련해 들려준 이야기는 이번에 첫 시집을 내자 걸어온 전화 이야기가 전부.

“용만아, 너 참 대단한 사람이다. 아프면서 돌담 쌓고, 글을 쓰면서 자리를 잡았구나. 자다가 일어나서 시집을 읽다가 행복하다, 내가 다.”

―바쁜 일상 속에서 시를 어떻게 쓰는가.

“일하거나 산책하다가 시상이 떠오르면 핸드폰 등에 바로 메모한다. 한 문장을 쓰고 다음 말들을 기다린다. 일기를 쓰니까, 일기에 시를 쓰기도 한다. (그는 정자로 쓴 일기를 잠깐 보여준다) 5년간 매일 일기를 써왔다. 시가 저절로 흘러나와서, 저는 그냥 빗자루로 쓸어 담기만 하면 된다.”

―벌써 전원생활 5년차인데, 하루 생활은 어떤지.

“여기 하루가 보기보다 빡빡하다. 매일 꽃과 뒤에 텃밭을 가꾸고, 밥하고 설거지하며, 빨래하는 것이 보통이 아니다. 매일 소양이 산책도 시켜줘야 한다. 처음 생활의 70%가 소양이와 관련이 있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다시 길을 나서는 기자에게 시인은 텃밭에서 기른 토마토 3개와 순두부 도넛을 챙겨준다. 집으로 돌아와 토마토와 도넛에 설탕을 쳐서 아들과 함께 먹었다. 아주 오래전 맛이 났다. 곧이어 어떤 그리움이 피어오르는데, 휘익휘익∼. 완주 위봉산 자락에서 거대한 관념이 아닌, 작지만 구체적인 일상에서 행복을 만끽하는 시인의 모습이. 고추 농사를 지어서 방앗간에 찢어서 돌아오는 길, 차 뒷좌석에서 흘러나오는 알싸한 냄새, 자꾸 뒤의 조마니로 돌아가는 눈길, 고갯길 넘어오면서 차오르는 행복감, 행복한 서 근 반의 무게가….

“빗방울이 새벽 지붕을 두드린다/ 산중 빗소리는 늘 요란하다/ 오늘은 위봉산성 너머/ 소양에 나가 고추 방아를 찧었다/ 두근거리는 서 근 반/ 아름다운 무게다/ 뒷좌석에 싣고/ 되돌아 넘는 고갯길/ 왜 이리 옹골지고 호복한지/ 사람들은 모른다/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는/ 알싸한 매운맛/ 가난한 자만이 알 수 있는/ 서 근 반/ 이 작은 조마니의 무게를”(‘서 근 반’ 전문)

 

김용만 시인은… ●1956년 전북 임실 출생 ●전주대 국문과 졸업 ●1987년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일과 시> 동인 활동 ●30여 년간 부산에서 마찌꼬바 용접사로 노동 ●2017년 전북 완주로 귀향 ●2021년 첫 시집 출간

완주=글, 사진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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