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대구의 한 양반 가출사건 배경
가족간의 이해관계 속 살인사건 비화
임금·중앙정부의 논쟁으로까지 번져
자녀에게 똑같이 상속하면 재산 감소
결국 17세기 이후 장자상속제 보편화

1556년 대구의 한 양반이 집을 나갔다. 당사자는 유유. 가족으로는 아내 백씨, 아버지 유예원, 동생 유연 등이 있었다. 단순한 가출 사건 정도였던 이 일은 훗날 임금과 중앙 정부가 개입하는 일대 사건으로 바뀐다. 6년 후인 1562년 매형인 이지가 유유라며 한 사내의 존재를 알린 게 시작이었다. 사내는 유유, 백씨 부부만이 알 수 있는 일을 전하는 등 가출 이전의 기억이 꽤 정확해 유유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꽤 흘렀다는 점을 감안해도 모습이 너무 달라졌다. 유연은 사내를 의심해 고발했고, 사내는 관청에 붙잡혀 있다 일시 석방된 뒤 사라졌다. 사내를 유유라 여긴 사람들은 동생 유연이 형을 사기꾼으로 몰더니 끝내는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런 혐의가 인정돼 유연은 사형을 당했다. 하지만 1579년 사내가 살아 있는 게 확인됐고, 진짜 유유도 나타나면서 반전을 맞는다.
고려대 권내현 교수는 근간 ‘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에서 이 사건을 꼼꼼하게 따져보며 조선시대 상속제도의 실제를 서술한다. 사건 당시 주요 당사자들이 보인 행위, 이에 대한 세간의 평가 등을 당대의 상속제도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유유의 귀환, 복잡해지는 가족 간 이해
책은 사건의 실체를 따지지는 않는다. 이를 판단하기 위한 자료가 부족한 데다 그나마 작성자의 입장에 따라 관점이 배치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유유의 귀환에 따라 이해관계가 얽혀버린 사건 당사자들의 태도, 사건에 대한 당대인의 인식에 배경이 되는 상속제도다. 전제는 조선이 상당 기간 아들, 딸에 차별을 두지 않고 공평하게 재산을 나누는 균분상속제를 적용하는 가운데, 제사를 지내며 집안을 이끈 이에게 어느 정도의 특권을 부여했다는 사실이다.
왜 당시 사람들은 유연이 사내를 죽였다고 생각한 이유를 따져보자. 사람들은 유연이 ‘탈적’(집안의 주도권을 가진 적장자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을 해 재산을 차지하려 했다고 보았다. 유유가 가출한 사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이어 집안의 대표하던 그의 지위는 사내가 유유가 맞다면 결정적으로 흔들릴 수 있었다. 이는 제사를 주관하며 더 많은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실질적 이익의 상실을 의미했다. 당시 조선은 집안의 정통성을 장남에서 장남으로 이어가는 종법(宗法)의 강제력이 강하지 않았고, 장남에게 집안을 이어갈 수 없는 문제가 있으면 다른 아들이 제사를 받들 수 있는 ‘형망제급’(兄亡弟及)의 관습이 있어 유연은 가출한 형 유유를 대신해 적장자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유유의 처 백씨의 태도도 눈길을 끈다. 백씨는 사내가 실종되자 ‘유연이 형을 죽였다’고 고소하며 사건을 조선에서 최악의 범죄로 간주한 가족 간 살해로 확대한 당사자다. 이는 백씨가 장남의 부인, 즉 ‘총부’(冢婦)로서 집안을 이끌 권한을 갖고 있어 유연과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책은 “총부는 집안 내 여러 며느리에 비해 지위가 월등하게 높았고 남편 유고 시 제사의 실질적인 주관은 물론 가계를 이을 이를 선택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유유, 유연 형제의 매형인 이지도 주요 당사자다. 이지는 처가의 재산에 욕심을 내 사내를 내세워 사기를 벌인 인물로 여겨졌다. 이런 평가는 조선시대 균분상속에서 딸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됐다. 딸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절이었던 만큼 아들과 다르지 않은 상속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처가로부터 받은 상속을 통해 경제적 성장 발판을 마련하는 양반 남성들도 적지 않았다.
◆‘모두 가난해지는 것보다는…’, 장남 중심 상속의 확산
유유 집안이 비극적으로 증명하듯 조선에서는 꽤 오랫동안 후손을 차별하지 않는 균분상속이 실질적으로 작동했다. 우리가 한때 조선의 전통으로 여겼던 딸보다는 아들, 차남보다는 장남 중심의 상속제도가 자리를 잡은 것은 17세기 이후에나 되어서였다. 이런 변화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우선 장남을 집안의 계승자, 제사 주관자로 확고하게 인정하며 부계 혈통의 영속을 염원했던 종법이 이즈음에 이르러 보편화된 것을 꼽을 수 있다. 종법은 “단기간에 보급된 것이 아니라 왕실과 특정가문의 장기적인 노력과 주변에 대한 영향을 통해 확산되어” 갔다. 시집살이가 이전의 처가살이를 대체한 것도 부계 중심의 집단 형성을 이끌었다.
자식들의 수에 따라 재산을 나누는 균분상속이 집안 경제력의 축소로 이어졌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한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용이다. 그는 “주요 가문들의 본종(本宗)이 어려움을 겪고 제사도 지내지 못하게 된 배경을 균분상속”으로 꼽았다. 선대의 재산이 막대할 때는 사람 수에 따라 나누는 게 큰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속할 재산이 줄어드는 경우가 많았다. 처가로부터 재산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힘들어졌다. 게다가 재산을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인 관직의 획득도 점점 어려워졌다. 가령 재령 이씨의 집안은 17세기 들어 이함-이시청-이신일 3대로 이어지는 동안 상속할 수 있는 노비는 161명→88명→50여 명으로, 토지는 821두락→400여 두락으로 줄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많지 않은 재산을 자녀들에게 똑같이 나눠주면 모두가 가난해지고 아들들은 제사를 지내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을 하는 가문들이 늘었다. 이것이 상속에서 딸을 배제하는 명분이 되었고, 상속 재산의 감소를 막는 방안으로 아들 중심 상속, 나아가 장자 우대 상속으로 이어졌다.
책은 “장자나 종손의 제사 봉행에 어려움이 있다면 딸은 물론 차자에 대한 상속 차별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내면화하고 있었다”며 “경제적 곤란은 딸이나 차자의 차별을 통해 종법의 정착을 앞당기는 측면도 있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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