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중 16년간 해외 주재원
휴가 땐 가족들과 와이너리 투어
직접 찍은 사진만 5만여장 달해
세계 최초 보르도에서 ‘와인 MBA’
2년 간 와인산업 전반 공부 매진
비즈니스 미팅서 와인지식 큰 도움
주변 여행지·호텔·추천 일정 소개
와인 전문가답게 깐깐한 리뷰 돋봬
인생도 와인도 50대50 균형이 최고

오디세이아(Odysseia).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지은 작품이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영웅이자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 트로이전쟁에서 그리스군 최고의 지략가로 이름을 날린 오디세우스는 전쟁을 끝내고 10년 동안 여러 바다를 떠돌며 온갖 기이한 일들을 겪는데 호메로스는 그의 모험을 대서사시로 엮었다. 30여년 동안 전 세계 와이너리를 찾아 누빈 거리 장장 20만km. 지구를 다섯 바퀴나 돌았다. 오디세우스보다 더 오랫동안, 더 많은 곳을 탐험했으니 감히 영웅의 이름을 책 제목에 빌려 써도 뭐라고 할 이 없겠다. 유럽의 유명 와이너리들을 찾아다니며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까지 총망라한 책 ‘와인 오디세이아’(사진)는 이렇게 탄생했다. 세계 최초로 프랑스 보르도에서 ‘와인 MBA’를 취득한 송점종 우리자산관리 대표가 펴낸 책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 와인 향기 가득한 유럽으로 보랏빛 탐험을 떠난다.
#‘와인 MBA’ 1호가 되다
서울 용산구 회나무로 오픈갤러리 ‘G 컨템포러리’로 들어서자 멋진 스카프를 목에 두른 송 대표가 반갑게 맞으며 샴페인 한 잔을 건넨다. 침이 살짝 고이는 산도와 부드러운 버블, 잘 익은 사과향이 버무려진 와인 한 잔을 마시니 소나기 내린 뒤 가득한 습기로 치솟던 불쾌감이 어느새 날아가 버린다. 평소에 송 대표가 갤러리로 운영하는 공간은 ‘와인 오디세이아’ 출판 관련 조형물로 꾸며졌다. 프랑스 와인산지가 담긴 지도와 프랑스 론의 샤토네프뒤파프 포도밭 사진에서 와인의 향기가 솔솔 배어 나온다. “모두 제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에요. 5만여장에 달하는데 그중 850장을 골라 와인 오디세이아에 담았답니다.”
송 대표의 본업은 부동산 관리와 운영. 와인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을 하는 그는 어떻게 와인에 푹 빠지게 됐을까. “32년 직장생활 동안 16년을 해외 주재원으로 보냈어요. 1년에 한 번씩 한국으로 휴가를 보내줬는데 가지 않고 가족들을 데리고 와이너리 여행을 다녔죠. 유럽의 웬만한 와이너리는 거의 다 가본 것 같네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송 대표는 당시 인기 높던 대우에 취직해 해외 주재원으로 나갔고 이때 와인과 만났다. 피곤을 무릅쓰고 주말이나 휴가 때면 무조건 와이너리로 달려갔다. 단순히 와이너리 투어에 그치지 않고 인근 여행지와 레스토랑, 지역 문화까지 샅샅이 훑으며 데이터를 차곡차곡 저장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와이너리를 많이 다녀 경험으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와인 지식에는 한계가 있어 와인 양조과정에서 와인마케팅까지 체계적인 이론을 공부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2001년 프랑스 파리에서 화가로 활동하며 와이너리를 여행을 함께 다니던 조카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보르도 경영대학원에서 ‘와인 MBA’ 과정을 세계 최초로 개설한다고 하더군요. 마침 대우그룹이 외환위기 사태에 따른 여파로 해체되는 상황이라 직장생활을 잠시 접고 와인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와인산업에 5년 이상 근무해야 입학 지원자격이 있더라고요. 그래도 혹시나 해서 대우 해외근무 10년 경력을 내세워 지원했는데 대학 측이 입학을 허가했어요. 당시에 대우가 유럽에서 많이 알려진 기업이고 와인산업에 종사한 것은 아니지만 국제 비즈니스 분야에서 수십년 동안 근무했기에 입학자격이 있다고 인정한 것 같아요.”
첫해 13명을 뽑았는데 모두 유럽 학생이고 아시아 출신은 송 대표 혼자였다. 현재도 와인 MBA를 받은 한국인은 송 대표 포함 단 2명이다. 싱가포르 2명, 홍콩 1명을 포함해 아시아에서도 5명에 불과하다.

#와인으로 소통하다
와인 MBA는 와인 양조과정은 물론 주요 산지의 특성과 와인마켓, 와이너리 경영까지 와인산업의 전반을 다루는 경영학 석사과정으로 2년 동안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 와인 MBA 과정 첫해 입학생 13명 중 10명이 졸업했는데 졸업식이 유럽 와인업계에서 큰 화제가 됐다.
“보르도 5대 샤토를 대표하는 샤토 무통 로칠드에서 학생과 가족 40명, 학교 관계자 30여명 등이 참석해 졸업식이 진행됐어요. 그런데 현지 언론 100여명이 열띤 취재를 벌일 정도로 세계 첫 와인 MBA 탄생이 큰 화제가 됐답니다. 당시 한 병에 수백만원에 달하는 1983년산 샤토 무통 로칠드 100병을 오픈한 것도 엄청난 기사거리였죠. 그때 아내는 감기에 걸려서 많이 못 마셨는데 요즘도 엄청 후회하고 있답니다. 하하.”
와인 MBA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송 대표는 서울벤처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잠시 강단에 섰다. 서울벤처대학원과 경희대학교 관광대학원에서 겸임교수로 와인 마케팅과 문화산업 경영을 강의했다.
송 대표는 와인은 ‘소통’이라고 강조한다. 대우 말레이시아 지사장 시절 겪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수력발전소를 수주하려고 설계한 영국 런던의 기업으로 출장 갔을 때의 일이다. 첫날 저녁 만찬에 초대받았는데 와인리스트를 주면서 송 대표에게 주문하라고 하더란다. 아마 동양인이 와인을 전혀 모를 테니 다시 와인리스트를 돌려줄 것이라 여겼던 모양이다.
“저는 와인리스트를 정독해 적당한 부르고뉴 피노누아 와인을 골랐어요. 그런데 옆에서 보던 소믈리에가 보르도 레드와인을 추천해요. 그러나 제가 볼 때 그 와인은 아직 마실 때가 되지 않아서 좀 터프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소믈리에게 이 와인 마셔 봤냐고 물었더니 제대로 답을 못해요. 그래서 내가 한국에서 마셔봤는데 탄닌이 아직 마실 때가 아닌 것 같다고 했죠. 제가 고른 피노누아처럼 보르도 와인은 탄닌이 부드러워지려면 최소 10년은 지나야 하고 그 시간을 버티려면 고급와인이어야 해요. 이런 와인 상식을 늘어놓았더니 소믈리에가 무조건 ‘예스, 예스.’ 하며 동의하더군요. 영국인들도 제 와인 지식에 깜짝 놀라는 눈치였죠.”

다음날 미팅 때 호칭에 큰 변화가 생겼다. 첫날은 그냥 ‘미스터 송’이라고 부르던 영국인들이 작위를 받은 이들을 칭하는 ‘서(Sir)’를 붙여 송 대표 이름을 불렀다. 와인지식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한국인들이 덩치도 작고 말도 어눌하며 와인도 모르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런 선입견을 송 대표가 깬 것이다. 자연스럽게 미팅의 주도권을 쥐었고 비즈니스는 순조롭게 풀렸다.
스타 셰프가 서빙하는 미쉐린 레스토랑에서 겪은 일도 소개했다. 9개 메뉴에 9가지 와인을 페어링하는 코스를 주문했는데 송 대표가 자신을 소개하고 전에 출간한 와인 책을 건넸더니 식사값을 받지 않고 셰프도 자신의 책을 선물했다. 그만큼 와인은 서로를 이어주는 중요한 소통창구인 셈이다.

#지구 5바퀴를 돈 와이너리 대장정
송 대표가 출간한 ‘와인 오디세이아’는 와인을 찾아 떠난 그의 30여년 세월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렇기에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의 여정에는 못 미친다 할지라도 송 대표가 만난 유럽의 무수한 와이너리들이 총망라돼 있다.
“1년에 봄, 가을 두 차례 와이너리 여행을 떠나는데 한 번 가면 보통 3000㎞를 이동해요. 렌터카를 빌려 운전하고 반납할 때 뛴 거리가 고스란히 찍히는데 모두 계산해 보니 대략 20만㎞에 달하더군요. 지구를 5바퀴 정도 돌아다닌 셈이죠. 여기에서 착안해 오디세이아를 책 제목으로 삼았답니다.”
송 대표는 그동안 방문했던 지역과 와이너리가 워낙 방대해 프랑스편과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묶은 유럽편만 추려 2권을 이번에 펴냈다. 30여년 동안 많이 변했기에 수차례 다시 현지 와이너리로 날아가 생생한 최근 정보를 업데이트했다. 책에 단지 와이너리 정보만 담은 것이 아니다. 방문지의 역사, 문화, 예술을 그의 다양한 경험과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으로 풀어냈다.
“두 가지에 초점을 맞췄어요. 기행문을 기본으로 와이너리가 있는 지역의 역사, 문화, 음식까지 다 아우르는 문화예술을 다루는 데 중점을 뒀답니다. 보통 와이너리 투어 하면 뻔해요. 지하동굴 셀러 구경하고 테이스팅하는 것이 전부죠. 저는 와이너리 주변까지 두루 여행해요. 예를 들어 이탈리아 ‘와인의 왕’으로 불리는 피에몬테 바롤로 지역에 갔다면 중심도시 알바를 여행하죠. 세계에서 가장 큰 트러플 산지가 알바에 있기에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을 어렵게 예약해서 찾아갑니다. 직접 트러플 헌팅도 하고요.”

송 대표는 이런 경험을 책에 고스란히 담았다. 와이너리 주변의 여행지, 레스토랑, 호텔, 추천 일정까지 소개해 와인 초보나 유럽여행 초보도 부담 없이 와이너리 투어를 즐길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와인 전문가다운 깐깐한 리뷰는 당연하다.
그는 와이너리 여행을 통해 ‘삶의 이론’도 터득했다. 바로 ‘50대50’이론으로 인류가 흘러가는 메커니즘이 여기에 모두 담겼단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물질 없는 정신은 허무하고 정신없는 물질은 무가치하다’고 얘기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돈은 있는데 머리가 텅 비었다면 지성이 없어 무가치해요. 반면 지식은 있는데 돈이 없다면 허무를 느끼게 되죠. 인간은 엄청난 지성인이지만 와인 한 잔도 못 사먹는 형편이라면 얼마나 허무하겠어요. 반면 악착같이 떼돈을 모아도 와인 한 잔 먹을 줄 모른다면 뭐 하러 그렇게 돈을 버는 것일까요.”
인간에게 유익하고 창조적인 제품은 항상 기술과 인문학이 결합하는 교체점에서 성공적으로 탄생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와인도 마찬가지란다. 북위 45도에 세계적으로 뛰어난 와인 산지가 대부분 몰려 있는데, 이는 북극과 적도 사이의 정확히 중간지대다. 적도의 뜨거운 공기와 북극의 차가운 공기가 적절히 결합하는 지역이 포도가 자라는 가장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그는 이를 모더레이션, 즉 중용으로 표현한다.
그에게 최고의 와인은 어떤 것일까. “기하학에서 가장 완벽한 것이 정삼각형이에요. 좋은 와인도 세 가지 꼭짓점이 중요한데 바로 탄닌, 산도, 알코올(당도)이죠. 산도가 50이라면 나머지 탄닌과 알코올도 50으로 균형으로 이룰 때 가장 좋은 와인이 탄생해요. 여기에 시간이 더해지면 삼각 꼭짓점이 둥글둥글해지면서 숙성이 잘된 완벽한 와인이 만들어진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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