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로펌 대표 등 피소 후 사망
애꿎은 피해자에 비난 악습 반복
“사망 뒤에도 조사” 법안 국회 계류
“수사결과 공표… 피해자 고통 경감”
“타 사건 형평 고려… 대안 찾아야”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에 나오는 구절이다. 지난해 7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이 문장은 온라인에서 널리 공유됐다. 피의자가 숨지면 사건이 종결돼 진실규명이 어려워지고, 남은 피해자는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해자로 뒤바뀌어 2차 피해에 시달리는 상황이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와도 같다는 의미다.
이 같은 ‘최종적 가해’는 끊이지 않고 있다. 수사를 받던 피의자가 죽음을 택하면서 진상규명이 어려워지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 경우 사건이 종결되더라도 피해자의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성범죄에 한해 피의자가 사망하더라도 진척된 수사 결과를 공개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29일 경찰 등에 따르면 최근 인천의 한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에서 앞에 선 여성의 등에 소변을 본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던 20대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지난달에는 자신이 대표로 있던 법무법인(로펌)의 초임 변호사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던 한 변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처럼 피의자가 숨지면 경찰은 수사를 중단한 뒤 ‘공소권 없음’으로 불송치 결정을 내리고, 검찰 역시 불기소 처분을 내린다. 피의자가 숨지기 전까지 진행됐던 수사 내용도 공개되지 않는다.

문제는 성범죄의 경우 수사가 이렇게 종결되면 ‘화살’이 피해자에게 돌아가기 쉽다는 것이다. 경찰의 ‘공소권 없음’ 처리를 ‘죄가 없음’으로 보고 피해자가 허위 신고를 했다고 보거나, ‘별거 아닌 일로 사람을 죽였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식이다. 실제 박 전 시장 사건 수사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자, 박 전 시장 측근 중 일부는 이를 근거로 박 전 시장의 무고함을 주장하며 피해자를 공격하기도 했다.
최근 로펌 변호사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측이 경찰에 그동안 진행된 수사 결과를 밝혀 달라고 요청한 것도 이 때문이다. 피해자는 “가해 사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게 됐지만 저는 순식간에 사람을 죽인 꼴이 돼 이중의 피해를 보고 있다”며 수사 결과를 공표해달라고 호소했다. 피해자를 대리하는 이은의 변호사는 “절도·살인범이 사망했다면 피해자 탓을 하거나 죽은 사람을 동정하지 않지만 유독 성폭력 사건에서만 피해자를 비난한다”며 “성범죄는 수사기관에서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확인해주지 않으면 객관적인 피해 사실이 남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박 전 시장의 죽음 이후 성범죄 피의자가 사망한 뒤에도 고소 사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는 법안(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 계류 중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검토보고서는 “진실규명이 불가능해지면서 피해자에 대한 의혹 제기 등 2차 피해 발생을 방지하고자 하는 개정안 취지는 공감이 간다”면서도 “현행 형사법 체계상 피고소인 등의 사망은 수사 실익이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보고서는 실체적 진실 발견을 위한 대안으로 국가인권위원회의 진정 제도를 제시했다. 지난 1월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을 직권조사한 인권위는 박 전 시장의 성적 언동이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다만 인권위에는 수사권 등이 없어 정확한 진실규명에는 한계가 있다. 이 변호사는 “‘공소권 없음’ 처분은 어쩔 수 없지만 불기소 사건의 불기소 이유를 알리는 것처럼 최소한 수사가 진척된 상황까지는 피해자에게 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공소시효 만료나 반의사불벌죄, 친고죄 등 다른 사건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건에 대한 정의와 진실 판단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건과의 형평도 중요하다”면서 “나머지 사건들은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지혜·이종민 기자 kee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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