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뷔인가. 눈을 비볐다.
“나도 어디서 찍혔을지 몰라 불안하다”, “밖에선 화장실도 못 가겠다”, “찍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 처벌해라”….

5, 6년 전쯤으로 시간이 돌아간 듯했다. 댓글을 읽는 내내 기시감이 엄습했다.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제2의 소라넷’이라며 수면으로 끌어올려진 ‘○○일보’ 사이트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을 살펴보던 때의 일이다. 불법 촬영물 제작·유포의 온상이던 ‘소라넷’이 처음 공론화돼 여성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던 2015년의 상황이 6년이 지난 지금,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사이트는 미성년자와 일반인 여성 대상 불법 촬영물을 제작·유포해온 곳으로 문을 연 지 불과 7개월 만에 회원 수 7만명의 대형 사이트가 됐다. 백화점과 공부방 화장실부터 대중목욕탕까지. 해당 사이트에서 공유된 수백, 수천 건의 불법 촬영물들 속에서 여성들은 또다시 자신도 모르는 새 익명의 피해자가 됐다.
회원 수 100만명의 불법 촬영물 공유 사이트였던 소라넷은 2016년 폐쇄됐지만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라넷과 유사한 사이트들이 생겼다 없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특정 사이트에 ‘제2의 소라넷’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주기 난감할 정도로 유사한 곳이 많다. 드러나지 않은 사이트들까지 감안하면 ‘n번째 소라넷’쯤으로 불러야 하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2015년 소라넷 문제가 공론화한 이후 우리 사회는 불법촬영과 유포를 막기 위해 다양한 제도적 장치와 대책을 만들고 막대한 비용을 투입했다. 2018년 서울시는 8000여명의 인력을 투입해 서울 시내 2만여곳 공공화장실을 매일 점검하겠다는 정책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 노력을 비웃듯 불법촬영 가해자들은 여전히 곳곳에서 여성의 신체를 몰래 촬영하고 유포하고 있었다. 제대로 단속되지 않은 채 법의 사각지대를 노린 수법만 더 교묘해졌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도 불법촬영이 근절되지 않고 비슷한 성범죄가 반복되는 현실은 여성들의 분노와 좌절을 부른다. 왜 불법 촬영물을 제작·유포하는 사이트가 계속 생겨나는지, 언제까지 화장실을 갈 때 얼굴을 가리고 벌벌 떨어야 하는지 회의감을 느낀다는 목소리가 넘쳐난다. 몇 번째인지 모를 불법촬영 근절 국민청원도 또다시 올라왔다. 지난 4일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는 ‘소라넷의 복사판인 ○○일보에 대한 수사를 정석적으로 진행하십시오’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와 19일 현재까지 7만7000여명의 동의를 받았다.
소라넷 공론화와 n번방 사건 등 굵직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잇따르자 언론 등에선 불법촬영과 성착취물의 유구한 역사를 연대표로 정리하기도 했다. ‘빨간 마후라 영상’을 시작으로 죽 나열된 그 부끄러운 연대표는 애석하게도 아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디지털 성범죄 연대표에 이름을 올릴 만한 악질적인 사이트들은 여전히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칼로 무 자르듯 모든 성범죄를 단번에 없앨 수야 없겠지만 수년이 흘러도 같은 일이 반복되는 데자뷔는 없었으면 한다.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들여 겨우 한 걸음 나아간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제자리걸음인 상황을 언제까지 되풀이할 건가. 언제 어디에서든 불법촬영 범죄 걱정을 한시름 덜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박지원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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