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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 ⑦ 경로의존성 : 마차는 어떻게 미래를 결정했을까

입력 : 2020-11-17 10:00:00 수정 : 2020-11-17 09:2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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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기기관차 등장 전 철도 달렸던 마차가 현대의 열차 폭 결정
익숙한 것 계속 쓰게 된다는 ‘경로의존성’
컴퓨터 자판 등 우리의 일상 곳곳서 발견
美 대통령 선거제도도 불편한 점 많지만
240년 넘게 익숙해져 바꾸기 쉽지 않아
스웨덴이 車 통행 우측으로 바꾼 것처럼
‘경로의존성’ 탈피가 불가능한 것은 아냐
1967년 9월 3일, 스웨덴은 자동차의 통행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꾸는 대대적인 시스템 변화를 도입했고, 새로운 방향에 익숙하지 않은 운전자들로 엄청난 혼잡이 벌어졌다.

1980년대 초에 등장해서 오래도록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전원일기’에 이런 장면이 등장한 적이 있다. 서울에서 사업을 해서 성공한 아들이 추석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당시 국산 모델로는 처음 만들어진 대형 승용차를 타고 내려왔다. 그 자동차를 본 동네 사람들은 “아무개가 어마어마하게 큰 차를 타고 왔다”며 난리가 났다. 어린 시절 봤던 그 에피소드를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는데, 그 자동차는 다름 아닌 ‘현대 그랜저’였다.

물론 그 모델은 지금도 ‘준대형’급으로 큰 승용차에 속한다. 하지만 1986년 전원일기에 등장한 그랜저는 1세대 모델로, 지금 보면 중형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만큼 작아보인다. 그 당시 사람들이 착시현상을 겪었던 게 아니다. 1986년 당시 1세대 그랜저는 정말로 큰 차였다. 그런데 지금 그 차가 작아보이는 이유는 모든 자동차들이 커졌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눈치를 챘겠지만 승용차들은 새로운 모델이 나올 때마다 사이즈가 커진다. 이건 만국 공통이다. 왜 그럴까?

우선 과거에는 없던 많은 기능과 안전장치들이 차량에 더해지고 있다. 과거 차량의 문짝은 지금 보면 충격적일 만큼 얇고, 범퍼는 빈약해 보인다. 그 정도로는 현재의 높아진 안전기준을 통과하지 못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넓고 조용하고 편안한 실내를 선호한다. 새 모델이 이전 모델보다 더 편안하고 쾌적하려면 차가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같은 차종인데 새 모델이 작아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럼 과연 차량은 무한히 커지게 될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도로와 차선의 너비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차가 커진다고 차선 간격을 넓혀 4차선을 3차선으로 줄이지는 않는다. 결국 현재의 차선의 너비는 자동차의 크기를 제한하는 한계선이다. 그렇다면 차선의 크기는 어떻게 정해졌을까? 그 너비는 마차가 정했다고 보는 게 맞다. 마차가 다니던 시절에는 도로에 차선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답은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에 있다.

철도(railway)는 증기기관차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 1807년 영국 웨일스에 처음으로 승객이 요금을 내고 철로를 따라 이동하는 서비스가 등장했다. 그런데 이 철도 위를 달렸던 건 말이 끄는 마차였다. 증기기관차가 승객을 태우고 달리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약 20년이 지난 후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초기에 사용되던 승객용 열차의 디자인이다. 초기의 열차는 <사진1>에서 보는 것처럼 전통적인 마차들을 줄줄이 연결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 ‘왜 긴 박스형 열차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그건 미래를 살고 있는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당시 사람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미래’를 본 적이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생산기술과 설비다. 마차는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만들고 발전시켜 왔던 익숙한 기술이다. 마차를 만들던 공장에서 바퀴만 조금 개조해서 철로 위를 달릴 수 있게 하고, 마차끼리 앞뒤로 연결하는 장치를 부착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긴 박스형 객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디자인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산기술과 설비, 자재가 필요하다.

게다가 초기 증기기관은 작고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기관 자체를 개선해서 키우기 전에 큰 객차를 만드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증기기관차가 크고 강력해졌을 때는 이미 곳곳에 철로가 깔린 후였다. 즉, 훨씬 더 크고 넓은 객차를 만들 수 있게 되었지만, 객차를 말이 끌던 시절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철도의 너비에서 벗어나는 게 불가능해진 거다.

에어버스 380이라는 초대형 여객기가 등장했을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워낙 큰 비행기라서 두 개 층으로 나뉜 객실에서 승객이 나오기 위해서는 보딩 브리지(boarding bridge)도 2층으로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주요 공항들의 일부 시설을 바꾸면 될 일이었다. 철도 다시 놓는 건 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결국 마차의 폭이 현대 열차의 폭을 결정하게 된 셈이다.

1931년 미국 뉴욕주에서 운행하던 초기 승객용 열차. 마차들을 연결한 모습을 하고 있다

마차의 미래 결정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사용되던 미 항공우주국(NASA)의 추진 로켓의 폭은 4피트 8.5인치인데, 이는 고대 로마제국의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의 폭과 똑같다고 전해진다. 그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철도의 폭이 마차를 기준으로 정해졌고, 그걸 기준으로 철도가 지나는 터널의 크기가 정해졌는데, 철도를 이용해 로켓을 이동하려니 터널보다 폭이 넓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궁극적으로 로마제국, 혹은 그 이전부터 사용되던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의 크기는 우주로 가는 로켓의 사이즈까지 결정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이 이야기에 호사가들의 과장이 조금 섞였을 수는 있지만 인류가 충분히 더 나은 방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후에도 전통적인 생각과 습관, 도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미 익숙한 것을 계속 쓰게 된다는 의미의 경로의존성 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컴퓨터 자판(QWERTY 키보드)은 타자기를 사용하던 시절에 타자기의 오작동을 막기 위해 속도를 강제적으로 늦추도록 일부러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말이 있을 만큼 불편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쓰기 시작한 후에는 아무도 바꿀 생각을 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판을 익히기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쏟았는데 어느 순간 바꾸자고 한다고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제도도 다르지 않다. 2016년에 도널드 트럼프는 2000년의 조지 W 부시와 마찬가지로 국민들로부터 더 적은 표를 얻고도 대통령에 당선됐다. 미국은 일반유권자들이 선거인단을 뽑고, 그렇게 뽑힌 선거인단을 누가 얼마나 확보하느냐로 대통령이 결정되는 간접선거제도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많은 미국인들이 간접선거를 폐지하고 다른 나라들처럼 직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자고 주장하지만 240년 넘게 사용한 제도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이미 그 제도에 익숙해졌고, 그것을 통해 이득을 보는 정치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로의존성을 벗어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생각해 보면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이미 인류역사에 가장 오래도록 지속되어 왔던 군주제라는 ‘경로’를 이탈해서 새롭게 만들어낸 제도다.

대표적인 사례가 스웨덴의 ‘다겐(Dagen) H’다. 원래 영국처럼 차량들이 좌측통행을 하던 스웨덴은 우측통행을 하는 주변국가들과 방향을 통일하기 위해 1967년 9월 3일, 일제히 교통시스템을 바꿨다. 그날 스웨덴에서는 전국에서 <사진2>에서 보는 것처럼 엄청난 교통대란이 벌어졌다. 그때까지 좌측운전을 하던 운전자들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려니 사고가 속출했고, 변화한 제도를 지키는 차량들과 그렇지 않은 차량들이 얽혀서 꼼짝 못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결국 스웨덴 사람들은 해냈고, 지금은 문제없이 많은 나라들처럼 우측통행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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