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주나라 여왕은 폭정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무당을 불러왔다. 무당이 점을 쳐서 불만자들을 색출하면 가차 없이 죽였다. 소목공이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하천을 막는 것보다 어렵다”고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여기서 나온 말이 ‘방민지구심어방천(防民之口甚於防川)’이다. 여왕은 학정을 계속하다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조선의 폭군 연산군도 신하들의 충언을 틀어막았다. 그는 신하들에게 ‘신언패(愼言牌)’를 목에 차도록 지시했다. 신언패에는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고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이 편안할 것이다’라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한마디로 살고 싶으면 입을 다물라는 겁박이었다. 이후 신하들은 왕의 비행을 보고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결국 연산군은 반정으로 쫓겨나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성군 세종대왕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경청의 대가였다. 늘 입버릇처럼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어느 날 어전회의에서 형조참판 고약해와 의견충돌이 빚어진 적이 있었다. 화를 주체하지 못한 고약해는 “정말 유감입니다. 전하께서 제대로 살피지 못하시니 어찌 신이 조정에서 벼슬을 하겠습니까”라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군주제 시대에 왕을 면박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중신들이 일제히 고약해의 언행을 규탄했다. 그러자 세종은 “내가 그를 벌한다면 왕이 신하의 간언을 싫어한다는 오해를 부를 수 있다”며 불문에 부쳤다.
백운규 전 산업통상부 장관이 월성원전 1호기의 ‘한시적 가동’ 필요성을 보고한 담당 공무원에게 “너 죽을래”라며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본인은 부인하고 있지만 보고서는 ‘즉시 가동 중단’ 쪽으로 고쳐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정권의 뜻에 맞추는 영혼 없는 공무원이 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으나 현실은 정반대로 굴러간다. 바른말을 하는 공직자들이 내쫓기거나 핍박당하는 게 언로의 현주소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쓴소리하는 평검사들에게 반개혁 딱지를 붙였다. 소통의 물길을 막는 것은 강물을 막는 것보다 위험하다. 둑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다.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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