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업혁명으로 인한 각박한 현실이 만연했던 때인 1849년 영국의 20대 초반 젊은 작가 세 명(단테이 로세티, 윌리엄 헌트, 존 밀레이)이 모여 ‘라파엘 전파’라는 미술 그룹을 탄생시켰다. 이들은 산업혁명 후 겪고 있는 획일화되고 정형화된 문명의 병폐를 예술을 통해서 풀어보려고 했다.
라파엘 전파라는 이름은 라파엘 시대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뜻에서 나왔는데, 라파엘이나 그 전통을 이은 아카데믹한 회화의 획일화된 방식에 대한 반발에서였다. 르네상스 이래 밝고 어두움을 같은 원리에 따라 묘사하고, 똑같은 조명 아래서 그림을 그린 것이 자연에 대한 진실한 태도가 아니라는 점을 나타내려 했다. 그래서 이들은 색채나 정밀한 세부 묘사를 통해서 자연에 더 가깝게 다가가는 회화를 목표로 삼고, 그 안에 사회적 의미도 담으려 했다.
밀레이의 ‘오필리어’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작품 ‘햄릿’의 여주인공 오필리어의 죽음을 그린 그림이다. 햄릿은 부왕을 죽이고 숙부와 결혼한 어머니에 대한 분노에서 항상 복수를 꿈꾸고 있다. 그러던 중 햄릿이 어머니와 다투는 얘기를 엿듣던 오필리어의 아버지를 우발적으로 죽이게 되고,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오필리어가 물에 빠져 죽은 모습이다. 왕자의 사랑을 부담스러워했지만 그도 역시 사랑에 빠졌었는데 나날이 변해가는 햄릿의 모습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오필리어의 심정까지 읽히는 것 같다.
허공을 응시하는 오필리어의 넋 나간 얼굴표정에서 정신착란 상태를 연상할 수 있고, 하얗게 질린 얼굴에서는 가련함과 애처로움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 밀레이가 밝은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 배경의 숲과 우거진 나뭇가지, 그리고 야생화에 이르기까지 자연 속 사물들을 정밀하게 묘사했다. 오필리어의 옷이 물에 잠기며 부풀어 오른 모양이나 옷 위의 장식과 물 위에 떠 있는 꽃들 묘사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생생함과 사실성을 잃지 않고 있다. 험난한 시대의 고통에 대한 은유이기도 한 망연자실한 표정이 꼭 지금 우리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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