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은 지난한 노동이라고, 그들은 온 일생으로 말한다. 지난 7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시작된 전시 ‘작업 : 판데믹의 한가운데서 예술의 길을 묻다’ 얘기다.
착취에 착취를 더하는, 고도화된 외주화의 정당성은 예술 영역까지 뻗쳤다. 어느새 예술가의 작업도 슬그머니 외주화해 착취로 탄생한 결과물을 예술이라 칭하는 주장이 사법권력을 등에 업고 면죄부를 받은 듯 떵떵거리는 날들이다. 이런 가운데 마침 예술가의 노동, 바로 작업이라는 과정 자체에 주목한 전시가 허망한 날들을 위로한다. 사기꾼과 모사꾼이 판치는 시대에 ‘작업’전의 화두가 길 잃은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 나침반처럼 다가온다.
작업전에는 구본주와 김명숙, 김승영, 김창열, 나혜석, 안창홍, 오귀원, 이응노, 이진우, 장욱진, 조성묵, 최상철, 홍순명, 황재형의 회화와 조각, 설치 작품 약 80점이 전시됐다. 저항, 역류, 고독 3개 주제로 구분된 전시장에 작가 14명의 작품들이 관람객을 맞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치열하고도 애처롭게 노동하고 작업한 삶이다.
가령 이진우의 작품 ‘무제(19-AC-29)’는 숯 위에 한지를 겹겹이 바르고 철 수세미로 끊임없이 두드린 과정의 결과물이다. 멀리선 단색조의 추상화로 보일 뿐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역동적으로 보인다. 기교적인 차원의 마티에르 효과를 넘어서는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이 지난한 과정은 당연히도 작가 당사자의 몫이었다. 이진우에게 반복적인 쇠솔질은 숨을 불어넣는 과정이었다. 김태서 학예연구사는 “행위 자체의 축적이 물성의 숭고함을 만든 것”이라고 소개한다.

안창홍의 ‘화가의 심장’은 미혹에 빠지지 않으려 예술가가 다잡은, 결연한 심정이다. 이응노는 ‘정치적 음모와 추방의 고통’을 작업으로 승화했고, 김승영은 ‘이렇다 할 무기 없이 지난한 싸움에’ 나선 고독함을 청동 작품 ‘슬픔’에 담았다. 폴리에스테르를 반복적으로 붙여 만든 ‘빵의 진화’를 볼 때는, 이 작품의 작가 조성묵이 이 같은 반복 작업 중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전시는 부제가 설명하듯,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우리 시대 조건이 ‘머릿속 예술’을 되돌아보라고 촉구한 데 따른 대답이기도 하다.
코로나19는 바이러스로 고통받는 것은 머릿속 개념이 아니라 신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했다. 바이러스는 사변이 아니라 폐세포를 공격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신체적인 사건을 향해 간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미술가에게 작업이란 무엇인가, 디지털미디어의 사회에서 여전히 유의미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제시하려 한 전시다. 김 학예사는 “인간의 육체, 움직임, 동작에 주목했다”며 “행위의 축적으로서의 미술이 재조명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서울대미술관에서 함께 시작된 ‘권훈칠, 어느 맑은 아침’전은 한결 화사한 전시지만, 마침 ‘작업’전의 문제의식과도 일맥상통해 함께 관람하기에 흥미롭다. 권훈칠이 “세계에 대한 경험, 그것을 그려나가는 과정, 그 결과로서의 작품에서 비롯하는 즐거움이야말로 창작의 동력”이라고 언급했다는 점을 이주연 학예사는 강조한다. 이 전시에선 그간 권훈칠의 작품을 언급할 때 비껴 있던 풍경화들을 모았다. 주로 드로잉과 수채화다. 특히 수채화는 세필을 써서 세밀한 표현, 청량한 색감이 특징이다. 붓질을 반복하다 색이 탁해져 수채화를 망쳐버린 경험이 있는 아마추어라면, 반복 붓질에도 실제 풍경보다 더 맑은 풍경화를 만들어낸 권훈칠의 ‘작업’을 감탄하며 즐기게 될 것이다. 맑은 물감을 묻힌 세필을 들고 도화지 위에서 짧은 터치를 지속하는 작가의 태도를 상상하다 보면, 착취로 떡칠 된 캔버스 같은 현대인의 마음을 조심스레 치유하려는 손길이 느껴진다.
지난 7일 전시장을 찾은 홍순명 작가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코로나19 격리 삼아 작업실에 처박혀 있었는데… 그게 힘들지가 않더라고요. 처박힌 채로 계속 작업하는 것이 쉽고 좋은 거예요. 그게 좋은 사람들이 바로 작가구나 하고 깨달았죠.”
‘작업’과 ‘어느 맑은 아침’, 두 전시 모두 9월 20일까지 계속된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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