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트럼프, 6·25 격전지 장진호를 왜 '초신'으로 불렀나

관련이슈 디지털기획

입력 : 2019-10-06 11:20:20 수정 : 2019-10-06 11:41:10

인쇄 메일 url 공유 - +

6·25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장진호 전투, 美 노병들에 '초신'으로 기억/ 군사용 지도 제작 능력 없었던 한국… 일본에서 만든 지도 가져다 사용 / 장진의 한자 '長津'을 일본식 발음으로 읽은 '초신'이 美 노병들에 각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군 ‘서열 1위’ 장교인 합동참모의장 이·취임식에 참석해 한 연설에서 한국을 두 차례 언급했다.

 

새로 취임한 마크 밀리 합참의장(육군 대장)이 과거 중령 시절 주한미군 2사단 대대장으로 근무한 점을 거론할 때, 그리고 이날 이임을 끝으로 42년간 입은 군복을 벗고 퇴역한 조지프 던퍼드 전 합참의장(해병 대장)의 부친이 6·25 전쟁 참전용사라는 점을 소개할 때였다.

 

장진호 전투(1950년 11월27일∼12월10일) 당시 미 해병대원들이 영하 30도에 이르는 추위에 꽁꽁 얼어버린 전사자들 시신을 트럭에 싣고 있다. 전쟁기념관

◆이임한 던퍼드 전 합참의장 부친은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

 

6일 미 백악관이 공개한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문 전문을 보면 그는 던퍼드 전 의장의 부친이 1950년 당시 미 해병대원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에 모두 참여했음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칭찬했다.

 

“그(던포드)의 아버지는 해병대원이었습니다. 아주 강인한 전사였죠. 한국의 인천에 상륙했고 초신 저수지에서도 싸웠습니다. (His father was a Marine — and a tough one — who landed on Inchon, in Korea, and fought at the Chosin Reservoir.)”

 

여기서 ‘장진호 전투’로 알려진 미군과 중공군 간의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 곳의 지명을 ‘초신(Chosin)’이라는, 한국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으로 부른 점이 눈길을 끈다.

 

트럼프 대통령만 그런 게 아니다. 미국에 생존해 있는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들 거의 대부분이 삶과 죽음이 왔다갔다 하는 치열한 싸움터였던 장소를 ‘초신’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그렇게 부른다. 왜 그럴까.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는 장진호 전투 관련 전시물. 장진호 밑에 영어로 ‘초신 저수지(Chosin Reservoir)’라고 표기한 것(빨간 원)이 눈에 띈다. 전쟁기념관

◆일본어 지도 들고 싸운 미군… '장진' 대신 '초신'으로 기억

 

장진호는 북한의 함경남도 개마고원에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이곳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며 기존에 없던 대형 인공호수가 생겨난 것이 바로 장진호다. 그래서 우리는 장진호(湖)라고 부르지만 영어로 옮길 때에는 호수(lake) 대신 저수지(Reservoir)를 붙인다.

 

6·25 전쟁을 통틀어 가장 치열했던 싸움으로 꼽히는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27일 시작해 12월10일까지 14일간 이어졌다. 미 10군단 예하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격하던 중 막 압록강을 건너 6·25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한 중공군 7개 사단에 포위돼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한국은 군대의 작전에 활용할 만한 정밀한 지도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 이에 미군 등 유엔군은 식민지 시절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국 지도를 구해 군사작전에 썼다. 자연히 한국 지명의 일본어식 발음이 영어로 옮겨졌다. ‘장진(長津)’의 일본어 발음이 ‘초신(Chosin)’이었기에 미군들의 뇌리에 ‘초신 저수지’로 각인된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주 콴티코 국립해병대박물관에 있는 장진호 전투 기념비. 장진(JANGJIN) 뒤에 괄호 하고 초신(CHOSIN)을 병기한 점이 눈에 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미 해병대 박물관 기념비, '장진'과 '초신' 나란히 새겨넣어

 

미 해병대는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끈질기게 싸워 포위망을 뚫고 되레 중공군을 퇴각하게 만들었다.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측 사상자는 1만7000명에 달했다. 지금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이오지마 전투와 더불어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힘들게 싸운 전투’로 기록돼 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미 해병대에 ‘초신 퓨(Chosin Few)’라는 말이 생겨났다. 초신에서 온갖 고난을 이겨내 마침내 ‘선택받은 소수(chosen few)’가 된 영웅들의 전투였다는 뜻이다. 장진의 일본식 발음 초신(Chosin)과 ‘선택받은’이라는 뜻의 초즌(chosen)이 서로 비슷하게 들리는 점에 착안해 만들었다.

 

이제는 대부분 80∼90대 노인이 된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들의 ‘초신’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들한테 ‘장진호가 올바른 표현’이라고 설명하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 2017년 미 버지니아주 콴티코 국립해병대박물관에 세워진 장진호 전투 기념비는 영어 대문자로 ‘JANGJIN(CHOSIN) RESERVOIR BATTLE’이라고 새겨 ‘장진’과 ‘초신’을 병기하는 타협안을 택했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군 합참의장 이·취임식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왼쪽) 등 참석자들이 이임하는 조지프 던퍼드 합참의장(혼자 앉아 있는 이)에게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다. 던퍼드 전 의장의 부친은 6·25 전쟁 당시 해병대원으로 장진호 전투에서 싸웠다. 미 국방부

◆"미군 등 유엔군 1만7000명 희생으로 대한민국 운명 구해"

 

서울 용산에 있는 우리 전쟁기념관도 장진호 전투를 소개한 전시물에 장진호의 영어 표기를 초신(Chosin)이라고 해놓은 사례가 눈에 띈다. 미국인 노병들한테는 장진보다는 아무래도 초신이 훨씬 더 낯익은 점을 참작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장진호 전투 현장에 있었던 미국인 참전용사 6명과 그 가족이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한국을 찾았다. 이들은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장진호 전투 영웅 추모식’에 참석하고 6·25 전쟁 당시 미군 전사자 이름이 새겨진 동판 앞에 헌화했다. 얼마 전에는 북한에서 미국으로 송환된 전사자 유해 가운데 장진호 전투 참가자 두 명의 신원이 확인돼 가족 곁으로 갈 수 있게 됐다는 언론 보도가 국내에 전해지기도 했다.

 

육군의 한 장교는 “장진호 전투는 역사적인 흥남철수를 통해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9만8000명의 민간인을 구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유엔군이 한반도를 포기하고 일본으로 철수할 뻔했던 위기를 극복했다”며 “장진호에서 빛난 인간의 정신력과 지휘관의 의지는 대한민국을 구해냈다”고 높이 평가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조이 '사랑스러운 볼콕'
  • 조이 '사랑스러운 볼콕'
  • 아이들 슈화 '깜찍한 볼하트'
  • 아이들 미연 '깜찍한 볼하트'
  • 이민정 '반가운 손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