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술을 마시면 늘 ‘건배’라는 의식을 치른다. 잔에 술을 채우고, 서로 잔을 부딪치면 동질감과 소속감이 생기는 문화다. 하지만 알고 보면 ‘건배’는 우리 전통의 문화는 아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 ‘건배’는 어디서 왔을까? 고대 바이킹족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당시 쓰던 잔은 대부분 뿔잔이었다. 아래쪽이 뾰족한 형태다 보니 잔을 세울 수 없었고, 늘 한 번에 다 마셔야 했다. 한마디로 ‘원샷’이다. 잔을 부딪치는 풍습은 적들과 화친을 할 때, 술잔을 부딪쳐서 잔 속의 술을 서로 섞음으로써 독을 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것이 대륙을 건너 중국으로 왔으며, 일본이 답습하고, 우리나라까지 전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건배’ 대신 무엇을 했을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건배 대신 등장하는 단어는 있다. 바로 ‘수작’(酬酌)이다. 갚을 ‘수’(酬), 따를 ‘작’(酌)하여, ‘술을 주고받고 나눈다’는 뜻이다. 술로 대화를 이끌어 간다는 친목을 나타냈다. 한 번에 다 마셔야 하고 잔을 부딪치는 건배와는 다른 문화이다. 이 ‘수작 문화’에서 나온 것이 ‘수작 부리다’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잔을 권하며 수작을 청하면 ‘꾀를 부린다’라는 의미로 해석된 것이다.

지금의 술병은 속이 훤히 보이는 유리병이 많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호리병, 또는 나무통이었다. 이렇다 보니 병 속에 내용물이 얼마나 있는지 몰랐고, 따라서 얼마큼 따를 수 있는지도 잘 몰랐다.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바로 ‘작정’(酌定)이다. 따를 ‘작’(酌), 정할 ‘정’(定). ‘상황을 보고 술의 양을 정하고 따른다’는 뜻이다. 작정하지 않으면 술이 한없이 넘쳐 흘렸고, 보는 이는 이것을 작정이 없다고 하여 ‘무작정’(無酌定)이라 불렀다. 결국 술이 워낙 귀했기에 ‘작정’이란 말이 ‘결정한다’는 뜻으로 이어졌다고 해석된다.
술과 관련된 단어로 ‘짐작’(斟酌)이라고 있다. 헤아릴 ‘짐’(斟), 따를 ‘작’(酌)이다. ‘술잔에 따르는 양을 생각한다’는 의미다. 술잔을 보고, 또는 상대방이 얼마나 마실 수 있는가,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를 상황을 보고 예상을 해 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법정 드라마를 보면, 죄질이 무거운데도 상황을 이해해 형량을 줄인다는 ‘정상참작’이란 말을 쓰곤 한다. 여기서 ‘참작’(參酌)이란 참여할 ‘참’(參), 그리고 따를 ‘작’(酌)이다. ‘같이 술을 따르던 자리에 있다’고 직역된다. 좀 더 풀이하자면 같은 상황, 나아가 같은 사회에 있기 때문에 책임이 오직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상황을 헤아린다’는 의미다.
‘수작’ ‘짐작’ ‘작정’ 등의 단어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의 삶과 역사 속에서 술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술에 대한 문화적 가치는 늘 외국의 것에서 찾으려고 한다. 와인이나 위스키가 대표적이다. 그들의 문화에 좋은 것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있다. 남의 것이 좋다면 우리 것도 좋기 때문이다.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는…
일본 릿쿄대학(立敎大學) 사회학과 졸업. 현재 SBS팟캐스트 ‘말술남녀’, KBS 1라디오 ‘김성완의 시사夜’의 ‘불금의 교양학’에 출연 중.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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