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 극장가에 여풍(女風)이 거세다. 선두 주자는 마블 스튜디오의 첫 여성 히어로물인 영화 ‘캡틴 마블’. 지난 6일 개봉한 지 14일 만에 관객 480만여명을 동원했다. ‘항거 : 유관순 이야기’와 ‘1919 유관순’,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여기에 극장가의 때아닌 여풍을 이어 갈 영화 두 편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모두 실존 인물이 주인공.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성차별에 맞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며 여권 신장에 기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법적 투쟁 통해 미국 바꾼 ‘긴즈버그’
“(판사가 되기 전) 성차별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게 제 일이었죠. 판사들에게 딸이나 손녀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시각을 심으려 했어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86)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은 남성 중심의 미국 법조계에 성차별의 존재와 부당성을 알리며 여성의 법적 지위 향상에 매진해 왔다. 지난 50여년간 변론과 판결을 통해서다. 오는 28일 개봉하는 영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는 긴즈버그 대법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미국 컬럼비아대 로스쿨 수석 졸업, 컬럼비아대 로스쿨 최초의 여성 종신 교수, 미국의 두 번째 여성 대법관…. 긴즈버그 대법관이 걸어온 길이다.

꽃길만 걸은 건 아니었다. 그도 젊은 시절 성차별에 시달렸다. 뉴욕 로펌에 입사한 남편을 따라 뉴욕의 컬럼비아대 로스쿨에 편입하기 전, 하버드대 로스쿨을 다니던 시절에는 정기 간행물실에 가기도 힘들었다. 경비가 “여자는 못 들어간다”며 막았기 때문. 로스쿨 학장은 “남자 자리를 빼앗았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로스쿨을 수석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건 당연지사. 당시 미국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와 지위에 대한 차별은 법에 따라 이뤄졌다.
1970년대 미국의 여성 해방 운동과 맞물려 긴즈버그 대법관은 법률가로서의 역할에 나선다. 럿거스대 로스쿨 교수가 된 뒤 ‘여성과 법’ 강의를 개설하고 성차별 사건 소송을 맡는다. 대법원 사건 6건 중 5건을 승소로 이끌어 낸다.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법조계 개척자”라며 대법관 후보로 지명한 이유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합리주의자다. “이기고 싶다면 고함치지 말라”고 조언한다. 법정의 공감대와 합의를 중시한다. 진보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는 초창기만 해도 중도 성향에 가까웠다. 2000년대 중반 대법원의 보수 색이 짙어지며 왼쪽으로 이동했다.
영화 속에서 긴즈버그 대법관은 말한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반대 의견을 낼 겁니다.” 동등한 시민권 확립을 위한 그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영화는 “그의 반대 의견 덕분에 젊은이들이 사법부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고 지적한다.

◆대필 작가에서 프랑스 대표 예술가 된 ‘콜레트’
하루 앞서 개봉하는 영화 ‘콜레트’는 프랑스 작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1873∼1954)에 대한 이야기다. 콜레트는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 주체적 삶을 찾고 프랑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거듭난 인물. “프랑스의 영광”, “우리들의 콜레트”로 불렸다.
1890년대 프랑스에 여성 작가는 없었다. 콜레트도 남편 앙리 고티에 빌라르의 대필 작가였다. 그가 남편 이름으로 처음 펴낸 자전적 소설 ‘학교에서의 클로딘’은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된다.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했다”는 평단의 호평이 쏟아진다. 클로딘 시리즈로 프랑스 사회에 콜레트 신드롬이 분다. 소설 주인공 클로딘의 이름을 딴 브랜드의 상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린다. 부와 명예, 스포트라이트는 “당신의 소설은 너무 감상적”이라며 혹평했던 남편에게 돌아간다.

남편의 유령 작가란 설정은 영화 ‘더 와이프’와 같다. 다만 콜레트는 ‘더 와이프’의 조안 캐슬먼과 달리 진실을 밝히고 당당히 권리를 찾는다. 남편과 이혼하고 세상 밖으로 나와 자신의 이름으로 ‘방황하는 여인’, ‘여명’ 등을 발표한다. 또 다방면에 걸쳐 명성을 떨친다. 작가뿐 아니라 뮤지컬 배우와 안무가, 연극 연출가 등으로도 활동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기자로도 활약했다.
콜레트는 “프랑스에서 예술가로서의 성취를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첫 번째 여성”이란 평가를 받는다. 불법 촬영 등 여성 혐오(여혐) 범죄가 난무하는 한국 사회에 이 두 영화가 시사하는 바는 작지 않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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